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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시혜라는 틀에 가둬버린 전작들의 변주곡

장애코드로 문화읽기/영화<보살핌의 정석(The Fundamentals of Caring)>

본문

 
▲ 영화 <보살핌의 정석> 포스터 (출처. 넷플릭스)
 
나는 ‘배려’, ‘도움’, ‘돌봄’, ‘보살핌’과 같은 단어에 예민해진다. 이것은 내 안에 이 단어들에 대한 불편하고 불쾌했던 경험들이 잠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보살핌의 정석>에 끌리지 않았던 이유기도 하다. 우선 이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를 보자.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고 마음을 씀(배려)’, ‘남을 돕는 일(도움)’, ‘관심을 갖고 보살피다(돌봄)’, ‘정성을 기울여 보호하며 돕는 일(보살핌)’ 등 수혜자보다는 시혜자를 향한 단어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단어들 뒤에는 늘 희생과 선함, 선행 등이 자동 수식되기 마련이고, 돌봄의 관계가 시혜 쪽에 기운 불평등한 관계로 인식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수혜자 입장에 기울 수밖에 없는 나의 편협함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 이렇고 우리네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영화 <언터처블 1%의 우정>이나 이를 한국에서 리메이크한 <퍼펙트 맨>(제작사는 다른 작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등 영화 속에서 장애인 또는 환자, 그리고 돌봄 종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담고 있는지를 떠올려 보자. ‘돌봄’이라는 일, 자격증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전문직으로 전문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감정적 유대감에 초점을 맞추고 결국 우정이라는 사적인 관계로 끝맺음한다.
 
더욱이 이들의 관계에는 경제력과 건강한 육체라는 조건이 붙는다. 경제력이 어마어마한 이용인과 경제력은 없지만 건강한 육체를 가진 활동지원인, 여기에 이들이 가진 계층, 인종, 교육의 차는 주류의 인식을 관통하며 이중 삼중의 편견과 혐오, 차별을 부추기는 위험한 만남일 수 있다. 영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용인의 장애나 질병에 조명을 밝혀 그저 돌봄의 대상으로만 안주시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룰이다. 결국 이 장면 장면들은 장애를 결함과 결핍으로 보는 기존 인식에 가둘 뿐이며, 영상 이미지에 더해 사랑 혹은 우정의 서사는 돌봄의 이용인과 지원인의 공적 관계를 그저 사적 도움으로, 시혜로 인식시키는 것의 매개일 뿐이다.
 
<보살핌의 정석>도 이런 문제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장면 장면에서 주인공 ‘트래버’의 장애를 화두에서 이탈시키며 그저 ‘트래버’로써, 오롯이 하고 싶은 걸 할, 그리고 보고 싶은 걸 볼 권리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지지하고 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인 혹은 동행인으로써 활동지원인의 역할과 전문성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동안의 영화들과 다른 인식에서 한 발 내디딘, 이 영화의 성취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영화 첫 장면에서 간병인 교육 강사가 강조하는 ‘알로하(ALOHA, Ask(묻고), Listen(듣고), Observe(관찰하고), Help(돕고) Ask again(다시 묻는다)이라는 간병인 수칙을 가리키는 약자)’인지 모른다.
 
그다음으로 많이 회자되는 것이 돌봄을 지원하는 일이 처음인 벤저민이 면접시험에서 받게 되는 질문이다. 그의 첫 간병인인 사춘기 소년 트레버는 ‘뒤센형 근위축증’의 장애를 가졌다. 그가 벤저민에게 “볼일을 본 뒤 제 엉덩이를 닦아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닦을 거예요?”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벤저민은 담담하게 “내가 볼일을 마친 뒤에 닦는 것처럼 묻어나오는 게 없을 때까지 닦아야지.”라고 답한다. 트레버는 엄마에게 “이 아저씨로 해요.” 한다. 맞다. 딱 이 선, 이 정도의 관계이면, 딱 이만큼이면 족하다. 이 영화가 말하는 ‘보살핌의 정석’은 바로 이 기본을 지키는 전문가적 태도와 소양인 것이다. 그렇다면 더도 덜도 말고 이 선, 이 정도의 관계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며 유지되는 것일까? 소통, 공감, 신뢰가 기본이지만, 이 모든 것에 기본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 일에 대한 전문성일 것이다.
 
그러나 이 더도 덜도 말고 딱 이만큼이 잘 안되고, 잘못되고 낡은 인식을 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의 딜레마를 이 영화가 어떻게 담아내며,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기대하게 만든 초반이었으나, 영화가 끝을 향하면서 점점 불편하고 실망스러운 것들이 고개를 번쩍번쩍 든다. 그 결정타는 “깨어났더니 몸이 멀쩡하다고 쳐. 뭘 제일 하고 싶어?” 라는 벤저민의 질문과 “서서 오줌 싸는 거요.” 라는 트레버의 대답이었다. 이후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시원하게 성공하고 기뻐서 함성을 지르는 트레버와 벤저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함성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고, 이 성공에 담긴 일탈, 자유, 해방, 성장의 키워드들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가 없었다.
 
우선 장애나 다름을 가진 소수를 위한 편의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대부분의 화장실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볼일을 보라는 것은 보지 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 서서 볼일을 보는 것을 남성성으로 인식하고 이를 과시하는 문화다. 그래서 좌변기를 사용하는 남성에게는 조롱과 비하 심지어는 혐오를 담은 시선과 말들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세상이다. 한참 예민한 10대 소년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시원하게 볼일을 볼 수 있었을까? ‘서서’라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욕구도 해결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 차별과 시선의 문제이다. 영화는 이 문제를 남성성, 남성의 특권쯤으로 인식할 뿐,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지 못했다. 이유는 정상성, 비장애성, 남성성을 우월하다거나 지향하는 세상의 인식에서 비롯된 벤저민의 물음과 트레버의 대답에 있다.
 
이뿐인가. 트레버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세상에서 가장 큰 소가 전시된 농장에는 휠체어 이동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트레버만 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건설법 위반이고 장애차별이며 불법이다, 지금 당장 너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거라고 벤저민이 경고한다. 몇 사람이 휠체어를 탄 트레버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 트레버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큰 소를 보게 된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불법이며, 장애 차별이고 벤저민이 열변을 토하며 해결하는 동안, 나는 그 옆에서 안 봐도 된다며 벤저민을 말리는 트레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또 트레버가 여행 중에 히치하이킹하는 도트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용기가 없어 말도 못 붙이고 돌아선다. 이번에도 벤저민이 나서서 도트를 설득하고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이 장면들에서 트레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의존, 회피, 체념의 태도만이 도드라진다. 트레버의 이런 태도에는 늘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트레버의 일상, 그리고 이런 일상을 살게 하는 세상의 인식과 차별들이 깊게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트레버의 활동지원인인 벤저민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영화에서처럼 해결사? 슈퍼맨이어야 하는 걸까? 이는 알로하 수칙의 선을 이미 넘어버린 것은 아닐까?
 
트레버와 첫 대면하는 도트의 언행에 거침이 없다. 이것은 <언터처블 1%의 우정>에서 필립과 첫 대면하는 드리스의 언행과도 유사하다. <보살핌의 정석>의 트레버도 <언터처블 1%의 우정>의 필립도 무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또래 남자로 인정해 주는 것으로, 또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는 쿨함으로 받아들이고, 대중들은 이에 동의하며 ‘편견 없는 무례’라 읽는다. 그러나 나는 불쾌했다. 이 불쾌감에 공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 이는 영화 속 세상일뿐, 현실에서 편견 없는 무례가 있을까?
 
영화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무성애로 취급하거나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인식을 비틀려는 의도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첫 대면에서 도트나 드리스처럼 상대를 막 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방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은 무례한 언행을 무례로 인식시키지 않고 편견이 없으므로, 인정과 존중의 또 다른 표현으로 그저 미화시킨다면 이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들로 굳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무례가 일상인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 장면 장면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레버가 “네 뜻은 알지만, 기분 나빠.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또 “내 문제이니 내가 말할게요.”라고 왜 말하지 못할까? 이 대사 한마디를 쓰는 게 이렇게 어렵다. 왜일까? 장애다음, 장애스러움을 요구하는 세상의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은 아닌지. 돌봄 수칙과 같은 돌봄의 겉피들을 공감할 수 있게 잘 담아낸 영화 <보살핌의 정석>이기는 하지만, 돌봄의 인식이나 돌봄 이용인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그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내겐 돌봄을 그저 도움을 준다는 시혜성에 머물게 한 전작들에 세련됨을 더한 변주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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