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예술에서 장애를 가진 배우가 설 무대는 없다 > 현재 칼럼


대중문화예술에서 장애를 가진 배우가 설 무대는 없다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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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 포스터
 
다름은 누구나가 가진 보편적이고 평범하며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다름에 열려 있는 사회가 아니다. 다르다는 것에 경멸과 위험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죄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다름에 폐쇄적이며 경직된 인식을 가진 미성숙한 사회다. 그러다 보니 장애라는 다름을 가진 내가 일상에서 순간순간 마주하는 것은 비정상, 비상식적인 열등한 존재라는 시선 아래 감지되는 혐오와 무례, 차별이다.
 
이런 사회를 투영하고 전하는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은?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 연극 등에서 장애를 가진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했던 정은혜 배우와 이소별 배우, 연극 '틴에이지딕'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에서 남자 연기자상을 탄 하지성 배우 정도가 떠오를까?) 아마 극히 드물 것이다. 또, 대중문화 콘텐츠를 창조하는 작가, 감독(연출자)은 물론이고 스태프 중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이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름을 혐오와 박해의 대상, 그래서 어우러질 수 없는 대상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인식에 더해, 한때 대중문화예술계를 휘둘렀던 검열의 칼이 다름을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정치, 사상, 성, 장애, 표현방식에 다름을 가진 문화 예술인들을 불온하다고 비정상, 비상식이라고 몰며 배척하면서 이들의 문화 예술적 가치를 평가절하했다. 그러면서 고인 물과 끼리끼리를 기반으로 다름에 배타적인 대중문화예술 환경을 만든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장애를 가진 배우가 설 무대는 없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스태프가 제작에 참여할 기회도 없다. 이를 부당과 차별로 인식하는 대중도 물론 없다.
 
장애를 가진 배우의 장애는 그 자체로 연기의 영감이자, 자원이다.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을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다. 수어를 하는 여주인공 사라의 표정과 손짓, 몸짓이 강렬하게 스크린을 장악하며 수어를 모르는 내가 자막을 읽지 않아도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감각적으로 전달되었다. 이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사라 역을 연기한 말리 매트린 배우의 팬이 되었고, 그녀가 출연한 다른 영화들도 보고 싶어 찾아보니, 이 영화가 그녀의 데뷔작이었다. 그리고 농인 배우임을 알았을 때는 ‘역시 당사자배우의 연기란 이런 거구나.’했다. 그녀의 수어와 감정, 행동이 한 몸이 된 연기는 굉장한 몰임과 교감을 자극했다.
 
말리 매트린은 이 데뷔작으로 제59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는 2021년 개봉한 영화 <코다>에서 루비의 엄마 재키 역을 연기하며 활발하게 배우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덧붙이면 영화 <코다>는 농인인 아빠와 오빠 등 농인 캐릭터들을 실제 농인배우들이 연기했으며, 아빠 역의 트로이 커처 배우는 94회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 스틸컷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제임스(윌리엄 하트)와 사라가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식사 중에 사라가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는 장면이다. 영화잡지에서 ‘과연 이 명장면이 말리 매트린 배우가 사라 역을 연기하지 않았다면 탄생했을까?’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말리 매트린이 아니었다면 음악의 진동을 느끼는 사라의 표정과 몸짓, 손끝 하나하나가 이렇게 살아있었을까? 이 장면이 이렇게 본능적이고 매혹적이었을까? 단언컨대 비장애인 배우가 연기하기에는 어려운 영역이었을 것이다. 사라의 춤사위를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제임스는 사라에게 “음악을 어떻게 느끼며 춤을 추는 거야?” 묻는다. 사라는 “음악의 진동을 느끼며 춤을 추죠.”라고 말한다. 이 대화는 실제로 말리 매트린과 감독이 촬영하면서 나눈 대화를 영화에 그대로 옮긴 것이라 한다.
 
농인인 사라 역을 농인인 말리 매트린 배우가 연기했기에 이 명장면과 이 대화는 탄생했고 완성됐으며 관객의 시선에 좀 더 밀착됐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장애를 할 수 없는 한계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방식이라는 열린 시선에서 바라볼 여지가 생겼을 것이다. 이것이 당사자성을 존중한 영화의 힘이며 당사자배우의 존재가 만든 영화의 완성도이지 않을까?
 
△ 영화 '시라노' 스틸컷, 오른쪽에서 두 번째 '피터 딘클리지' 배우
 
또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피터 딘클리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영화는 <시라노>다. 17C 희곡 ‘시라노’가 원작이며, 원작에서 ‘시라노’의 콤플렉스가 코의 크기였다면, 영화에서는 작은 키다. 작은 키가 콤플렉스라는 것, 이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 앞에 나서지 못하는, 무엇보다도 시라노의 마지막 선택에는 반발심이 발끈발끈 일었지만, 딘클리지의 연기는 최고였다. 딘클리지는 왜소증이라는 자신의 장애를 자원으로 시라노의 외면부터 내면까지 완벽하게 연기했다. 그가 연기하는 폭발하는 시라노, 시로 사랑을 노래하는 로맨틱하고 지적인 시라노, 록산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목숨으로 증명하는 시라노를 보고 있노라면, “연기는 본뜨는 것이 아니다.”라는 메소드 연기론을 정립한 ‘리 스트라스버그’의 말의 실체를 보고 있는 듯, 그 자체가 시라노였다.
 
이처럼 장애 당사자 배우만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사유해 온 것들이 연기로 표출되는 영역이 있다. 아무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취재하고 자문받으며 연구해도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 한계와 부족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고 무시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우리 대중문화예술이 ‘불편한 몸’이라고 규정하면서 배제해 온 장애당사자 배우가 연기하는 무대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가 아닐까?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최근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를 가진 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원작의 캐릭터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캐릭터에도 인종, 성, 장애 등의 다양한 정체성을 입혀 당사자배우들을 캐스팅한다. 이 배경에는 우선 그 사회 속 당사자의 목소리, 존재감일 것이고 그만큼 다양성을 보편성으로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리라. 또한 대중문화예술 비평이 향한 방향도 무시할 수 없다. 과거 서구에서는 원작에 아시아계나 흑인 역할을 백인으로 각색해 백인이 연기하게 하는 ‘화이트 워싱’이나 백인 배우가 흑인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블랙 페이스’가 성행했다고 한다. 비평가들은 이를 문화적 도용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같은 맥락에서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 캐릭터를 연기하는 ‘크리핑 업(Cripping up, 장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 비평가들은 어떤가.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비장애인 배우의 연기력 검증으로만 여길 뿐, 이를 문제로 인식하고 비판하는 글을 읽은 적이 거의 없다.
 
한편, 제작 일선에서는 장애 당사자 배우가 캐스팅되지 않는 이유를 캐릭터에 맞는 이미지에, 연기력을 갖춘 장애당사자배우를 찾기 어려운 현실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애당사자배우의 양적 질적인 확보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먼저라고 이야기한다, 너무나 공감하고 동의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은 배우의 꿈을 갖는 장애학생들에게 대학교의 연극영화학과나 연기학원의 문턱은 너무나도 높고, 작품 속 장애캐릭터의 부족은 물론이고, 장애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회는 비장애인 배우에게 먼저 돌아간다. 현재 우리나라의 장애인식을 볼 때 과거 미국이 흑인배우의 출연을 의무화했던 것과 같이 장애를 가진 배우의 출연을 권고하는 조항이나 연기교육을 받을 수 있는 지원이 마련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장애를 가진 배우가 연기할 기회와 무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 연극 '불굴의 왕 리처드3세' 포스터
 
요즘 들어 연극무대에서 장애당사자 배우와의 협업이 늘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비장애인 배우와 비장애 관객 중심의 사고로 협업 과정에서도 상처와 차별을 감수하는 것 역시 장애당사자 배우의 몫인 듯하다. 얼마 전 장애당사자 배우와 사전협의 없이 언어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그의 대사만 자막을 올렸던 일이 있었다. 말로는 배리어프리공연이라면서 장애를 가진 배우를 무시한 차별로 모멸감을 안겨준 것이다. 그리고 연출자는 관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의 공연을 의미하는 배리어프리의 왜곡이다. 애초에 이 배우를 캐스팅한 데는 언어장애도 캐릭터의 한 부분으로써 그 자체가 이 작품의 메시지이며, 관객에게도 전달되어야 했다. 이것을 무시한 연출이 과연 작품을, 관객을 위한 연출이었다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최근에 방송된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도 비(非)농인 시청자만을 의식해 농인 캐릭터들의 대사에만 자막을 내보내는 편협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또 농인캐릭터가 다섯 명이나 등장하는데 실제 농인 배우가 연기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제작 현실에서 과연 장애당사자 배우의 인프라가 구축된 들 장애배우들이 장애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 제작 일선의 이야기들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우문으로 떠넘기려는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는 이유다.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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