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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접근성, 세계 접근성

장애와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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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BitDo Lite SE ⓒ8BitDo
 
아마도 1997년, 삼촌에게 물려받은 386 컴퓨터를 시작으로 나의 게임 인생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던 것 같다. 삼국지를 테마로 한 대전 게임과 심슨 아케이드 게임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더더군다나 집 밖에 나가기 위해서는 엄마 등에 업혀 계단을 내려가야 했던 근육병 장애아동에겐 말이다. 나는 음극선관 모니터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며 성장했다. 도스가 윈도우가 되고, 천리안이 다음이 되고, 컴퓨터 본체가 점점 커지는 동안 나는 언제나 모니터 앞에 앉아서 컴퓨터가 열어주는 가상의 세계를 탐험했다.
 
부모라면 이런 자식이 신경 쓰일 법도 한데, 나의 부모님은 오히려 새로운 게임이 더 잘 돌아갈 수 있는 새 컴퓨터를 사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내가 새로운 게임이 안 된다고 몇 번만 이야기하면 얼마 뒤 아빠가 퇴근길에 새 컴퓨터를 사 들고 오는 식이었다. 부모님이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상황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어났다. 고학년이 되면서 수련회며 수학여행이며 자꾸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서 2, 3일을 지내야 하는 건 그 시절의 휠체어 사용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학급 임원도 맡으며 잘 나대는 자식이 혼자만 며칠씩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것. 그게 부모님은 마음 쓰였던 것이다. 다른 애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날, 나는 부모님과 홈플러스에 갔다. 그리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2를 품에 안아 들고 금의환향했다(실제로 안아 들었던 건 아닌데 박스가 매우 컸고 무겁기도 했다).
 
오직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기계와 콘트롤러가 데려다 주는 세계는 도트로 된 2D 세계와는 여러 의미로 차원이 달랐다. 나는 뾰족귀 외계인이 되어 귀여운 인공지능 로봇과 함께 우주 곳곳을 여행하며 온갖 공구를 휘둘렀다. 가끔은 외국의 어딘가임이 분명한 곳에서 차를 운전했고,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였던 프로 레슬링의 인기 선수들을 직접 조종해 친구들에게 초크슬램을 먹일 수도 있었다. 꼭 게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내 성적이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에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게임기나 컴퓨터에 잠금장치를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임은 나에게 있어 너무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 게임을 점점 할 수 없게 됐다. 중학교 3학년 때 받은 척추 측만 교정 수술은 나에게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너무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숨을 쉬기도 힘에 겨웠고, 덩달아 근육병 증상도 악화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하나에 힘이 안 들어갔고, 그것을 심정적으로 겨우 받아들일 만하면 또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손가락도 나로부터 등을 돌렸다. 나는 더 이상 게임 컨트롤러를 손에 쥘 수 없었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조차 제한적으로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 달이 멀게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었고, 그와 비슷한 속도로 나는 내게 큰 의미가 있던 세계로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나는 좀 무식할 정도로 집요한 편이었다. 특히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위험하리만큼 달려들었다. 그 당시 내 타깃은 아두이노였다. 아두이노란, 초소형 컴퓨터 같은 건데(그래도 386보다는 사양이 좋다) 여기에 기초적인 프로그래밍을 짜 넣으면 아주 개인적인 정보통신 보조기기가 된다. 단순하게는 마우스 클릭을 할 수 있고,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원하는 일련의 동작을 자동화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게임용 매크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걸로 디아블로 같은 게임을 하면서 느낀 재미는 오히려 게임 자체보다 더 커다란 것이었다.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더라도 세상에는 많은 대안이 있으며 그런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즐길 만하다는 것을. 마치 게임처럼 말이다.
 
사실 요즘에는 각 잡고 게임할 여유가 거의 없는데도 그저 그런 가능성을 찾는 재미로 새로운 보조기기나 게임 접근성 정보를 찾아본다. 최근에는 8BitDo라는 중국의 게임 컨트롤러 제작 업체에서 아예 장애인을 타겟으로 한 특수한 컨트롤러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품 자체는 나온 지 꽤 되었다. 나로서는 게임 컨트롤러에 다시 관심 가질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 아예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건데,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기는 하다.
 
8BitDo는 레트로 스타일의 기계식 키보드 등으로 유명한데, 그뿐 아니라 온갖 유형의 게임 컨트롤러를 출시해 많은 게이머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중국의 인기 제품들이 그러하듯 8BitDo의 키보드나 컨트롤러도 명확한 컨셉과 나쁘지 않은 품질, 결정적으로 저렴한 가격 특징으로 시장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는데, 게임 접근성을 위해 출시한 Lite SE는 “For Gamers with Limited Mobility”, 즉 기동성에 제한이 있는 게이머를 위한 컨트롤러다.
 
이쯤 되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가격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장애인을 위해 특별하게 만들어진 것들은 대체로 가격까지 특별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휠체어도 싼 가격은 아니지만, 거기에 틸팅이다 리클라이닝이다 기능이 추가되면 될수록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제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블루투스 스위치는 웬만한 보급형 스마트폰 가격이다. 나처럼 일반적인 스위치를 누를 힘이 없는 경우에는 스위치도 아주 특별한 것을 쓸 수밖에 없는데, 국내 의료기상을 통해 정식으로 수입 판매하는 특수 스위치는 개당 20만 원이다.
 
하지만 8BitDo의 Lite SE의 가격은 불과 3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4만 원이다. 이걸로 꼭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블루투스 기능으로 뭐든 해볼 수 있을 테니 그냥 무조건 샀다. 업체의 홍보대로, 매우 민감하게 작동하는 조이스틱과 스위치는 내 근력으로도 제어가 가능했다. 게다가 컨트롤러를 책상 같은 곳에 올려놓고 쓸 수 있게끔 모든 버튼을 앞면에 배치한 디자인은 그들이 뭔가를 알고 만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홍보 영상을 보면 장애아동이 모델로 출연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모델이 아니라 개발 과정에서 함께하면서 피드백을 제공한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후속 제품을 마이크로소프트와 정식으로 협력해 출시하였다. 이건 적응형 스위치 두 개를 끼워주면서도 60달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제품들의 리뷰에는 제조업체의 재정을 걱정하며 과연 이것들을 꾸준히 팔 수 있을까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 마이크로소프트가 장애인들의 엑스박스 게임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출시한 Xbox Adaptive ⓒXbox
 
마이크로소프트가 특히 그런 걱정을 많이 받는 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만큼은 아니지만 게임계에서 거대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그런 살리에르적 입지 때문일까, 아니면 기부왕 빌 게이츠의 영향일까.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의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우와 엑스박스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 꽤나 애쓰는 눈치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적응형 컨트롤러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장애인 게이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처음 그것을 본다면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는데, 조이스틱 하나 달려 있지 않은 그것은 컨트롤러라기보다는 컨트롤러 허브에 가깝다. 상단부에 무수히 많이 배치돼 있는 오디오잭 단자는 하나하나가 컨트롤러의 기능들에 매치되어 있어서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한 적응형 스위치를 연결해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엑스박스 적응형 컨트롤러는 단독으로 쓰기에는 좀 부족하고, 100달러라는 가격도 엄청나게 저렴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컨트롤러가 60달러 선에서 책정되어 있고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닌) 특수한 기능이 포함된 것들은 수십만 원도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마이크로소프트 정도는 좀 걱정을 할 만도 하다. 엑스박스라도 잘돼야 할 텐데.
 
내가 알지 못했을 뿐 게임 접근성을 높이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노력은 유서가 깊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주로 영미권과 유럽에서 그런 노력을 먼저 시작했다. 8BitDo의 특수한 컨트롤러를 사기 위해 알아보던 차에 영국의 원스위치라는 보조기기 판매업체를 운영하는 사람과 상담차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특히나 게임 접근성에 진심이다. 특수 제작한 컨트롤러와 조이스틱 및 스위치는 물론이고 컨트롤러를 입맛대로 리맵핑할 수 있는 장치에 직접 프로그래밍해서 판매하며, 자체적으로 접근성 옵션을 제공하는 AAA 게임을 발굴해 데이터베이스화하는 등 게임 접근성을 위해 그야말로 A에서 Z까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특히나 나는 원스위치에서 판매하는 게임 컨트롤 믹서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을 이용하면 8BitDo Lite SE 같은 컨트롤러를 연결해, 조이스틱 하나와 버튼 하나로 일반적인 컨트롤러의 모든 기능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플레이스테이션을 통해 우주를 유영하던 감각을 그리며 원스위치 운영자와 구매 상담을 했다. 그는 한국으로의 배송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자신이 서울에 가게 됐다며 갔다 와서 마저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때마침 서울에서는 보조기기 박람회가 열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심포지엄의 연사로 왔다 갔던 거였다. 그는 시차에 허덕이며 대한민국에 게임 접근성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감탄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발표한 자료를 보내주었다. 상당한 분량의 게임 접근성 관련 발표 자료를 보면서 그가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에게서 뭐라도 꼭 사고 싶었다. 그는 이번에는 브라질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와는 거의 몇 달에 걸쳐 대화를 나눈 것 같다.
 
결국 그에게서 구매한 장치는 기본적으로는 엑스박스 적응형 컨트롤러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입력장치를 연결하고 특수 제작한 프로그램을 통해 보다 수월하게 게임을 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이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을 남들처럼 즐길 수 있느냐 한다면 글쎄. 하지만 내가 마우스를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서 더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수많은 장르의 게임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게 됐다. 해외의 도로를 질주하고 우주를 유영하고 나만의 세계를 창조할 가능성을 되찾은 것이다.
 
△ 비장애 남성과 장애 남성이 함께 Xbox 게임을 즐기고 있다 ⓒ Xbox
 
게임이라는 것의 대중적 인식을 고려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 이야기만 늘어놓는 이 글이 어떻게 보일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그런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혼자서 또는 다 함께 모여 모두가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장벽을 허무는 노력을 하고 있다.
 
대체로 영어권 커뮤니티에 치중돼 있긴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인터넷 브라우저에 내장된 번역 기능과 기계 번역 서비스를 통해 의사소통의 장벽이 많이 허물어진 상황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동성에 제약이 있더라도 가상 세계는 비영어권의 우리에게는 이제 막 막이 걷힌 새로운 무대인 것이다. 커뮤니티에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피드백을 주고 받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펀딩을 통해 실재화하고 앱스토어에 정식으로 등록돼 지구상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그 소비자인 장애인들이 온라인이라는 배리어프리 무대에서 자신의 소비 경험을 공유하면 이것이 다시 상품에 반영돼 더 높은 접근성을 확보한다. 이런 사이클은 집에서만 지내는 누군가에게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가짜에 불과하고 주머니에 챙길 수 있는 뭔가를 주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보다는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뭐든 그렇겠지만 말이다. 
작성자글. 최의택 작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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