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정신장애 인권을 돌아보며, 옴스테드 판결을 다시 생각하다
법으로 만나는 세상
본문
2024년 한 해 동안 정신장애 분야에서 가장 큰 인권 이슈는 단연 '격리·강박' 문제였다. 춘천예현병원에서 정신장애인이 251시간이나 강박 당한 끝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고, 병원장 등 책임자들이 형사책임을 면했으나, 민사소송에서는 2억 3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명백히 제한 시간을 어겨 장시간 강박하여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에 형사책임도 인정되어야 마땅했지만, 병사(病死)로 처리되어 부검도 없이 시신을 화장해 버린 탓에 범행을 입증할 수 없는 등 문제가 많았다. 유명 병원장이 운영하는 부천 더블유(w)진병원에서는 30대 여성이 장시간 강박 끝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사건으로 병원장은 국회 국정감사에 소환되어 질타를 받기도 했다. 사망한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이 CCTV에 분명히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장은 의료조치에 미흡한 점이 없었다며 책임을 부인했다. 그 외에도 서울 해상병원, 인천 ㅅ병원에서의 격리·강박으로 인한 사망 사건들이 연이어 보도되면서 보건복지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실태조사에 나섰다.
올 한해 이렇게 정신병원 인권 문제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사실 이 문제는 새로운 문제도 아니다. 강압적이고 폐쇄적인 정신의료시스템 하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해 왔고 발생할 수밖에 없던 억울한 죽음들이 한 언론사의 노력으로 하나씩 밖으로 드러났던 것뿐이다. 정부의 실태조사는 당사자 참여도 배제된 채 형식에 그칠 우려가 크고, 몇몇 잘못 걸린(?) 병원들에게 경징계를 내린 뒤 지키지도 않을 매뉴얼을 조금 개정하는 것으로 이슈를 덮을 공산이 크다.
정신장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배제하는 정신보건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격리·강박문제와 정신장애인들의 억울한 죽음은 사라질 수 없다. 정신보건 시스템 자체가 사회로부터의 ‘격리’와 자유를 옭아매는 ‘강박’인데 무엇을 바꾼다고 정신병원 내 격리·강박 문제가 달라질까? 결국은 장애인을 사회와 격리하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옴스테드 판결’을 떠올려 본다.
미국의 탈시설화를 이끈 ‘옴스테드 판결’
옴스테드 판결의 원고는 각각 지적장애와 조현병, 지적장애와 인격장애가 있는 두 명의 여성이었다. 두 여성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 지역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하였지만 폐쇄병동에서 치료를 받았고, 전문의가 지역사회 프로그램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정부가 계속 정신병원에 머무르게 하면서 지역사회 프로그램에 배치하지 않은 점에 대해 미국 장애인법에 따른 ‘장애인 차별’을 주장하면서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옴스테드 판결이 탈시설에 있어 기념비적인 판결로 꼽히는 이유는 장애인의 시설수용 자체가 차별임을 인정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미국 장애인법(ADA)이 장애인에 대한 고립과 분리를 ‘심각하고 만연한 차별의 한 형태’로 규정하고 있음을 인정한 이 판결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두 명의 원고를 정신병원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 정부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애인의 시설수용이 차별인 이유는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시설에 수용하는 것은 그렇게 고립된 사람이 지역사회에 참여할 능력이 없거나 자격이 없다는 부당한 가정을 영속화하며, 시설에 감금되면 가족 관계, 사회적 접촉, 경제적 독립, 교육, 문화 향유 등 개인의 일상 생활 활동을 심각하게 위축시켜 이러한 핵심적인 측면에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미와 한계
미국 탈원화의 상징적인 판결로 꼽히는 옴스테드 판결은 정신장애인의 시설수용 문제를 단지 정신병원 내 환경 문제라거나 보건의료시스템 문제로만 보지 않고 보편적 장애 문제로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대로 정신병원 내 인권 문제나 정신의료시스템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은 점은 아쉬움이 남는데, 이것은 두 원고가 장애 차별을 주장했지 정신보건시스템 문제를 들고 나선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별 판단에서도 아쉬움이 드는 것은 법원이 ‘전문의가 지역사회 프로그램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는데도 병원(시설)에 수용한다면 차별’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여전히 의사의 판단에 의존하는 의료적 패러다임에 입각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의사의 판단도 절대적이지 않으며 자의적일 수 있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치료받는 것은 인권 차원의 문제이지 의사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다. 어디에서 치료를 받을지의 문제는 내가 결정할 나의 문제이지 그것이 어떻게 의학의 영역인가? 의사는 의료서비스의 제공자로서 이해관계자이며, 그 의료적 판단에도 경제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
또한 옴스테드 판결은 탈시설을 조건적으로만 인정했고 오히려 시설을 옹호하는 측의 논리로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 판결에서 법원은 “ADA의 어떤 조항도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감당할 수 없거나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시설수용의 종료를 용인하지 않으며,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지역사회 기반의 치료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특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만 탈시설을 가능하다는 의미이며 ‘시설을 선택할 권리’를 말하는 우리나라의 탈시설 반대론자의 주장과도 닮았다. 이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의 삶을 선택할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정부의 책임을 간과하는 것이며, 선택지가 없는데 선택의 자유를 운운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옴스테드 판결 12주년을 맞아 소송 당사자였던 루이스 커티스 씨가 백악관을 방문,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 출처. The White House Blog)
또한 원고들의 주장은 지역사회에서 치료받는 장애인들과 비교하여 본인들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치료받고 있는 것이 차별적이라는 것이었는데, 판결의 소수의견은 차별 판단은 특정 속성을 가진 집단 간의 차별 문제이기 때문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문제이지 지역사회에서 사는 장애인과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 간의 차별은 ADA상의 차별의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법원에서도 특정 유형의 장애를 가진 사람의 장애인용 콜택시 이용을 거부한 것은 장애 유형간의 차별이지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차별이 아니기 때문에 차별 행위가 아니라고 판시했는데, 이는 차별행위의 개념을 형식적으로만 해석하여 장애인 차별 해소와 권리구제라는 장애인차별금지법과 법원 본연의 목적을 잊은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위에서 언급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옴스테드 판결이 미국의 탈시설화를 이끌고 지역사회 기반의 서비스 체계를 수립한 역사적인 판결임에는 변함이 없다. 옴스테드 이후 미국은 탈시설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시설에 유입되는 예산을 줄이고 지역사회 서비스를 늘리는 주를 위해 연방 의료비 지원 인센티브 제도를 만들었다. 옴스테드 판결 이전까지 미국의 공공의료보험제도인 메디케이드(Medicaid) 자금은 주로 시설에 사용되었으나, 판결 이후 서서히 지역사회 서비스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2013년 드디어 지역사회 지출이 시설 지출을 초과하게 되었다. 탈시설화 정책의 결과로 대형시설의 수와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의 수는 극적으로 감소하고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장애인의 수는 증가했다.
이미 언급했듯 옴스테드 판결은 장애인에 대한 분리와 배제의 문제로서 시설수용 문제를 다루면서 장애차별임을 선언한 기념비적인 판결임은 맞지만 정신병원 내의 인권 문제나 정신보건시스템 문제를 다루고 있는 판결은 아니다. 정신병원 내 처우나 인권 문제는 와이어트 판결(Wyatt v. Stickney)이나 로미오 판결(Youngbergv. Romeo)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어느 한 판결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기보다는 소송을 통해 장애인의 인권을 일궈온 미국의 인권운동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다양한 측면과 방식으로 정신장애인권운동이 전개돼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옴스테드 판결은 2025년과 그 이후 우리의 정신장애 인권운동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 첫 번째는 정신장애인권문제 역시 보편적 장애인권으로서 장애차별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정신장애인들이 장애인복지에서도 소외되어 있듯 정신장애 인권운동도 지금까지는 장애인권운동 내지 탈시설운동의 맥락에 포함되지 못했다. 정부가 발표한 탈시설 로드맵에서 정신장애인의 탈원화가 빠져 있는 것만 보아도 장애인권과 정신장애인권이 서로 분리된 채 별개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애운동이 이뤄가고 있는 성취들을 정신장애인들도 마땅히 누리고 공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사회를 설득해 내기 위해서는 때론 유보적인 태도가 필요할 수도 있다. 옴스테드 판결은 단계적이고 조건적으로 탈시설 권리를 인정했고, 탈시설로 인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까지 했다.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탈시설(시설폐쇄)과 국가배상까지도 요구하는 입장에서는 옴스테드 판결이 단지 미온적인 판결로 비춰질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옴스테드 판결을 계기로 미국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디고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으나 개별적 권리는 패러다임의 전환 하에서 더욱 두텁고 영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
세 번째, 장애 당사자의 권리 운동에 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사회를 변화시킨 옴스테드 소송은 자기 권리를 찾고자 하는 장애인의 권리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를 뒷받침 해 준 옹호자(변호사)와 사법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신병원에 감금된 사람이 변호사를 찾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부터가 우리 정신장애인 인권 현실과는 괴리가 느껴진다. 나아가 ADA라는 강력한 장애차별시정도구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미국에서 탈시설이 가능했던 조건 중 하나였다. 우리도 법률적 지원을 포함하여 정신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속히 구축해야 하고 정신장애인이 사법에 접근할 수 있도록 사법접근권 보장이 시급하다.
지난 2011년 소송의 원고인 루이스 커티스는 판결 선고 12주년을 맞아 백악관을 방문하여 오바마 당시 대통령을 만나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정신병원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창작활동을 하고 있고 또 동료상담가로서 지역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장애인들을 안내하고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적절한 지원과 서비스만 있다면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낸 루이스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 사람에게 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작성자글. 김강원 법무법인 디엘지 공익인권센터 부센터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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