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아이티 땅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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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 대한 꿈, 타인을 향한 사랑,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도전
이런 것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모든 것을 시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마를 가로지르는 주름만큼이나, 복부에 축 늘어진 뱃살만큼이나, 이런 것들은 언뜻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듯해 보입니다. 꼭 한 달 만에 아이티를 다시 찾았습니다. 스무 시간의 긴 여행 내내 그동안 나이 먹었음을 핑계로 잊고 살아왔던 몇 가지 단어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꿈, 사랑, 도전.
삶의 무게에 눌려 흐물흐물 녹아버린 소중한 말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의 옆 좌석에 앉아 동양에서 온 한 숏 다리의 주절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로즈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 (사진제공: 김월림) |
“미스터 김, 사실 인간이 생각하는 안전한 삶의 방식은 우리를 새장 안에 가두어두는 고도의 장치가 아닐까요. 이것에 한번 걸리면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지요. 그리고는 서서히 세상에 대해 전혀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아니, 이 프랑스 여자 의사양반 왜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러나 그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글쎄 뉴욕에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들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로즈를 만났지 뭡니까. Le monde est petit(세상이 참 좁습니다). 로즈는 국경 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s) 소속으로 아이티에서 일하고 있는 간 큰 프랑스의 여자 의사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간이 큰 정도가 아니라 두툼하게 부어올랐거나 아예 간을 따로 빼놓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이 금발의 여자 의사는 모든 것에 거침이 없습니다. 지난번 레오간 긴급구호 현장에서 잠깐 만났었는데 워낙 키가 큰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강렬한 포스를 느꼈던지. 그는 아프리카의 수단과 콩고 등지의 분쟁지역에서 수년 간 일한 이 분야의 베테랑입니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세계의 위험지역을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는 로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옆자리에 앉아 있는 로즈를 해부해보고 싶은 맘이 굴뚝같습니다. 그의 말과 표정을 통해 내가 확실히 느끼는 것은 로즈에게 세계의 고통 받는 이들과의 적당한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과 빈곤, 각종 위험에 직면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감각기관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를 통해 국경 없는 의사회의 가치와 정신을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름다운 카리브의 바다 위를 비행하며 아이티 땅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이해하는 나의 감각기관이 다시 살아 움직여야 할 텐데. 그동안 그들의 슬픔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러는 동안 타인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감각기관이 무디어지지는 않았는지.’
▲ (사진제공: 김월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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