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의 바람은 누구에게 휘몰아 쳤는가?
본문
「인권은 물, 공기처럼 형태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것! 규정짓고 단정 짓기보다 노력하고 고민하는 것 」
- 2013년 어느 인권교육 현장 평가에서 -
앞으로도 내가 장애가 아니란 것에 감사하고 살아가야겠다?!
가끔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에게 인권교육을 가서 교육을 마치고 학생들과 느낀 점을 나누다보면 수업을 들은 학생들 중 약 30%가량이 이와 비슷한 평가를 한다.
수업 내내 ‘장애’에 대한 긍지가 철철 넘쳐나고 멋있는 장애인 보여주고 ‘장애’라는 것이 누구의 책임도 아닌 우연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신나고 재미있게 인권교육을 잘 해도 장애를 불행한 것으로 인식하는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비장애인에게 하는 장애인 인권교육이 오히려 비장애인의 건강함과 ‘장애인으로 전락하지 않음을 확인’시키는 위험성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작은 설명서 첫 번째 이야기(함께걸음 2013년 8월호 참조)에서도 장애인을 더욱 불쌍하게 만드는 인권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지 항상 성찰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하여 인권교육을 하는 모든 이들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 위험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장애인의 우월함을 확인시키고 강화시키는 우리 모두의 ‘인권교육의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다. 어쩌면 장애에 대한 비장애인의 공포는 동물적인 습성이요, 본능일지도 모른다. 아주 드문 경우를 빼고는 자연계에서는 장애 동물, 장애 식물들을 찾아 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고백하건데 필자도 이렇게 부디 자식들은 장애가 없기를, 배우자들은 이왕이면 나보다는 장애가 가볍거나 없기를 바라는 욕망과 본능에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외칠 수 없다.
그래서 장애인 인권교육은 장애인을 위한 교육이기도 하지만 비장애인을 위한 진정한 인간화 문명화 교육이기도 하며, 장애인 당사자에게 스스로의 존재의 가치를 알려주는 교육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인권교육에서 진정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권교육 강사 스스로 장애가 콤플렉스가 아닌 ‘다양성’으로 생각하는 가치관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장애를 불행한 것으로 비장애를 우월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인권교육의 감수성은 절대 강사들의 감수성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인권교육을 하는 장애인 당사자나 비장애인 모두 자신과 장애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과 경험이 없다면 반 인권적인 공격을 견디기 어렵고 교육 받는 사람도 설득할 수 없다.
필자의 경우에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비장애’에 대한 부러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일단은 편리하고 차별이 없는 비장애인으로서의 삶의 경험은 아예 필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 되었고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수많은 차별과 서러움을 경험하였지만, 다른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장애인임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사랑과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굳이 비장애인이 되고 싶은 욕망도, 되고 싶다는 기도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인에서 비장애인이 되는 게 두려울 정도다. 때때로 새로운 길을 운전해서 갈 때마다 수없이 지도를 보고 길을 외우고 마음속에 새기며 길 위에 돌발 상황과 위험요소에 내 근육들이 경직되지 않고 충분한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쓴다. 그러나 이렇게 제 몸과 신경을 제 스스로 의심하는 것은 정말 실증된 공포와 통계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것은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본인에게 만들어낸 편견이자 공포인 것이다.
그들은 왜곡되면 헷갈리는 신호를 내려 보내는 뇌와 육체를 소유하고 조정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조정 기술을 익히느라 사십 평생을 바쳤는데 다시 ‘비장애’를 운전하라니!
장애인 인권교육의 목적이 장애인을 비장애인을 부러워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장애인차별과 소외를 금지하는 인권교육을 하는 이유는 장애인 스스로 장애인에 대한 긍지와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환경과 경험을 제공하기 위함일 것이다.
왜냐하면 장애인이 태생된 것은 누구 개인의 책임이 아닌 우연일 뿐이며 문명의 책임일 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장애에 대하여 긍정하고 칭찬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이미 장애에 대하여 긍정하고 칭찬하고 있을 것이다.
“장애라는 건 단지 자신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한 개인에게 장애인이란 것은 그 사람의 모두를 설명해 주는 전부가 아니다.
‘장애’란 요소를 한 개인의 전부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편견이자 선입견이 될 것이며 낙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인권교육도 단지 ‘인권교육’이라고 불리는 것이 옳다. 섣부른 구분 짓기는 위험한 일반화를 불러 온다. (드라마 ‘굿닥터’에서 보듯이) 그래서 그 전에 글을 통해 필자는 장애라는 요소는 당사자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향이자 거울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인권교육은 장애인의 ‘장애’에 대해서만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통찰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도움이 된다면 장애가 훌륭한 통찰력의 도구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장애인이란 분류와 구분은 국가와 사회가 도움과 지원을 주기 위해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일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 그 통찰을 우리는 전해주어야 한다. 장애인은 나랑 같은 사람, 보통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통찰한다면, “장애? 그게 뭐 어때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장애도 장애인도 더 이상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을 테니까.
(마지막까지 이 글을 다 읽고서, 그래도 자폐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독자분들. 우리의 인권감수성, 장애감수성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지적 자폐성 장애인, 정신장애인의 장애 역시 차이로 보려는 용기와 창의성과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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