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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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어쩌면 좋아.”
“쥐꼬리만 한 좁은 땅에서 방법이 없지 뭐.”
“세상에나! 바다 가운데 길을 내다니…….”
“국익이 우선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갯벌을 죄다 없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시화방조제를 지나 화성의 송산면과 남양 일대를 달리면서 그와 나는 선문답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손발이 잘려나간 것처럼 바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막을 수 있는 곳은 전부 막아버렸고 메울 수 있는 곳은 온통 메워버려서 과연 대한민국 지도의 변형은 불가피해 보였다. 차창 밖으로 수없이 펼쳐진 갈대군락지와 무성한 풀숲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 너머로 바닷물이 간신히 들고 빠지는 형국이었다. 차라리 바다보다 간척지가 더 너른 지경이었다. 얼른 봐도 수천 헥타르의 땅이 방치되어 있었다.
“무슨 권리로 이렇게 망쳐놨을까.”
“망치긴? 명석한 양반들 탁상공론이 아닌 다음에야 어련 개발하지 않겠어?”
“바로 그 명석함이 문제예요 문제! 못난 사람은 국으로 엎드려 있기나 하지. 뭐 그리 잘난 사람이 차고 넘쳐나서 지도까지 바꿔놔야 직성이 풀릴까?”
“참, 그 양반들 말 들어보라고. 국익을 도모한 국토개발의 일등공신이지. 광개토대왕만 영토를 확장한 게 아니라고.”
한솥밥을 먹는 부부 사이도 이렇게 의견 차이가 나는데 ‘잘난(?) 분들’이야 오죽할까 싶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과연 몇 개의 포구가 사라진 걸까? 간척지 이전의 서해를 상상해봤다. 바다기슭을 낀 작달막한 어촌의 풍경을…… 고만고만한 고깃배들의 출현과 물이 빠진 잿빛 갯벌…… 동네 아낙들의 수수한 조개 채취…… 저물어 먼바다에 이우는 붉은 노을…… 그 노을 아래 한가로이 떠 있는 배 한 척……. 상상만으로도 스르륵 잠이 올 것 같았다. 그 평화 그 고요를 누가 빼앗아 갔단 말인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그 값진 삶을.
‘친환경개발’이라는 신조어를 대할 때마다 아뜩해지고 만다. ‘개발’을 과연 ‘친환경’적으로 할 수 있는지 말 자체가 무색해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개발과 환경의 융합이라니? 환경은 인간과 동식물의 생존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 조건이나 상태를 이른다는 사전적 정의와도 전혀 맞지 않는 어불성설이다. 물론 자연을 덜 훼손하고 생태계를 덜 파괴하려는 긍정적 차원의 신조어라는 사실은 십분 수긍하겠다. 더하여 다른 대안이 전혀 없고 개발만이 필연적이므로 필요악을 전제하고라도 그것만이 해결점일 때는 불가항력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겠다. 농경지 확장에 따른 식량생산 증가와 수자원 확보 및 상습피해지역 해소, 공업부지 조성으로 인한 고용창출 확대와 그 외에도 육운 개설로 종합관광권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국토개발의 양상인 간척사업이 절절할 만큼 과연 필연적인가? 전문성이 결여된 견지에서도 반드시 그런 건만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시대의 담론이 된 지 오래다. 그 심각한 폐해는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선은 갯벌이 사라지게 된다. 캐나다 동부 연안과 미국 동부 조지아 연안, 아마존 강 하구 및 북해 연안과 함께 세계 5대 갯벌 중의 하나인 이 땅의 서해 갯벌이 사라지는 것이다. 수심이 낮고 조차가 커서 퇴적물이 잘 쌓일 수 있고 육지로부터 영양물질이 축적되는 생태계의 보고가 없어지는 사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어민들의 농토와 다름없는 갯벌을 없애버림으로 그들이 받게 되는 생계의 위협은 국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생태계는 파괴되고 막대한 자금은 쏟아 부어야만 하는 간척사업의 대안은 과연 없는 것인지……. 독일은 연안의 갯벌지대를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매립한 간척지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파행적 길을 계속 가야만 하는 걸까? 물론 독일과 미국이 아닌 한국적 상황과 딜레마를 깡그리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불을 보듯 뻔한 결말을 인정하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그 치부만은 최소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환경운동가나 생태주의자가 아니다. 장자의 철학을 신봉하고 탐하는 자는 더더욱 아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는 걸 보면서도 에헴, 헛기침을 해대며 손 놓고 앉아 서책에만 코를 박던 어떤 부류의 선조들을 답습하고 싶지도 않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외치는 환경운동의 선두주자도 못 되고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비누로 머리를 감는 철저한 생태주의자는 더더욱 어렵다. 어딜 가든 그저 휴지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각종 세제를 줄여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땅에서 나고 자랐으니 절전 가능한 일들은 실천하는 쪽이다. 말하자면, 도심 속 소시민적 삶의 방식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내가 자동차를 타고 서해연안을 달리는 심정은 안타깝다 못해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방조제를 당장 파내고 오래전의 끝 간 데 없는 바다로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넘실거리며 부딪치는 파도가 어디만큼이라도 내달려서 바위를 때리고 연안 산기슭을 수도 없이 갉아먹어 기기묘묘한 절경을 만들어나가길 바랐다. 자연은 그저 내버려두면 스스로 변화하지 않을까? 인간과 동·식물과의 생존을 꾀하면서……. 지구과학이나 생물학적 지식이 턱없는 내 상식으로도 그러하기에 자연(自然)이리라. 저절로 그렇게 된 그것. 본래 억지나 꾸밈이 없는 그것을 우리는 어쩌자고 막아버리고 메우고 돋우는 행패를 일삼는가. 대체 무슨 권리로 아름다운 해안선을 갈기갈기 찢고 토막토막 잘라버렸을까. 아아, 나는 꿰매고 붙여 놓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덜 먹고 덜 쓰고 덜 입고 조금만 불편하고 조금만 참고 조금만 기다리면 될 터인데 우리는 언제인가부터 이러한 ‘덜’에 조바심치고 ‘조금만’에도 난색을 보인다. 뭐든 편리성과 물리적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갯벌이 사라지고 바다가 물길을 잃어 황망한 표류에 시달려도 끔쩍하지 않는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해안선은 허리를 부러뜨려 놓듯 사정없이 끊어서 모래언덕이나 잡풀 무더기를 만들어놨고 바다는 그 너머에서 감금된 채 신음하고 있었다. 간신히 숨통만 틔워 놓은 꼴이니 건너다보기에도 적이 안쓰러웠다. 바다가 품고 있어야 할 생명은 머지않아 사장될 것이었다. 아아, 나는 차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잠깐씩 눈을 감았다.
송산면 일대를 돌아나갈 때 군데군데 간이 원두막에 포도 상자가 즐비했다. 광활한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갯벌을 잃어버린 어민들은 포도생산에 기대 사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생업터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간직한 채 대처로 떠나거나 포도송이를 세며 살아왔으리라. 몇몇 노인이 오래전 풍성한 어촌을 환기하는 것조차 뜨악하다는 표정으로 깊고 굵게 패인 주름을 달고, 달리는 자동차가 원두막 앞에 서 주기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서성였다. 지팡이를 의지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노인 앞에서 그는 차를 세웠다.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요량으로 포도상자 대여섯 개를 뒷좌석에 싣는 그 옆에서 노인은 송산포도의 우월성에 대하여 홍보했다. “달기가 아주 최고요, 최고.” 오른손에 잡았던 지팡이를 왼손으로 옮기며 시커멓게 그을린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노인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웠다. 그는 많이 파시라고, 잘 먹겠다고, 예를 갖추고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온통 포도밭뿐인 동네를 지나서 여기저기 숨통을 조여 놓은 바닷길로 다시 들어섰다. 뒷좌석에 있는 포도의 신맛이 물큰 끼쳐서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씁쓸했다. 해풍 없는 포도라니?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야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지 않겠는가. 해양성 기후에서 성장한 포도야말로 당도가 높고 싱그러운 향이 으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다가 사라지고 바닷바람마저 쫓겨난 송산에서 포도는 지팡이를 의지한 주인 노인처럼 초라하게 그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차창으로 스쳐 가는 바다의 몰골은 너덜너덜했다. 수평선 아득한 바다를 구불구불한 서해연안을 따라가며 바라보는 감흥은 이제 꿈속에서나 기대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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