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아름다웠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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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한 시간 남짓.
수십 명의 주인공과 만나는 일은 때마다 색다른 경험이다. 그분들과 나의 만남은 어쩌면 만남이 아니라 ‘목격’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저 무르춤하니 보고 오는 것. 고작 내가 하는 일이라곤 그분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것. 짧고 간결하게. 약 삼사 분 동안 나는 허망해지고 마는 것이다. 대체 이분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내게 육안(肉眼)과 지안(智眼)만 있다면 영영 허무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터, 다행히 영안(靈眼)에 의지해 더듬더듬 그분들의 방향을 가늠해본다. 그 생과 사의 갈림길을…….
휠체어와 지팡이, 또 다른 보행 기구에 의지해 그분들은 예배실로 들어선다. 노인요양병원이므로 대개는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간호인의 부축을 받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죄다 환의를 입고 손목에는 입원 팔찌까지 채워진 채다. 어쩐지 성 구별이 없어지거나 모호해진 느낌을 종종 받는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굵고 깊게 팬 주름, 그리고 무표정한 낯빛. 사람이 자연사가 가까워지면 성을 잘 식별할 수 없게 되는 이치를 얼마 전에 깨닫게 되었다. 간혹 짜증스러움이 잔뜩 묻어난다거나 활짝 웃는 얼굴에서만은 쉽게 남녀 성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게 내 육안의 판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나는 저분이 할머니일까 할아버지일까 찬찬하게 살핀다. 그만큼 그분들의 무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박 무위의 나락에 떨어지게 한다.
그 헛되고 덧없는 생멸변화를 읽는 일은 때로 고단하기까지 하다. ‘아아, 저분에게도 파릇파릇했던 유년의 꿈과 화려했던 청년의 야망, 그리고 강렬하게 사랑했던 젊음이며 눈과 귀가 순해져 삶을 여유롭게 했던 생의 한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하리라.’ 한 분 한 분 생로병사의 추이를 톺아보면 그 흐름과 변화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그곳은 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흘러 온 종착지였다. 바꾸어 말하면 이생과 저 생의 중간지대라고 할까? 그곳을 다녀올 때마다 비감에 휩싸이는 것은 내가 미성숙한 탓일 게다. 생과 사,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의 부재에서 오는 비감이리라. 한 사람이 적신으로 와서 한 줌 흙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그것을 초월할 자 누구이랴. 벌거벗고 왔으니 빈손 들고 돌아갈밖에. 자루처럼 헐거워진 그분들의 환의를 대하면 그곳 중간지대는 육체를 비우는 수련장소임을 실감한다. 점점 여위어 그분들의 몸피는 앙상한 삭정이처럼 메말라간다. 이생을 벗어날 준비는 차츰차츰 서서히 진행되리라.
처음엔 느릿느릿 걷다가 얼마 지나 지팡이를 의지하고 또 얼마간은 휠체어에 몸을 담고 출입하곤 하는데 그나마도 보이지 않을 그때, 그분의 임종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달마다 낯이 익은 분들을 확인하곤 한다. ‘이번 달도 나오셨구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맥없이 걷더라도, 한 손은 지팡이를 잡고 또 한 손은 간호인에게 붙들린 채 겨우겨우 걸음을 떼어 놓더라도, 운신조차 어려워져서 휠체어에 떠밀려오더라도, 나는 그분들을 뵙기 원한다. 노쇠와 병고로 시달리는 고통만을 놓고 보자면 속히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가길 바라지만 자신의 삶을 정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황망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내 죽음의 방식-엔딩 다이어리 500일>
(쇼가쿠칸)은 주목할 만하다. 저자 ‘가네코 데쓰오’가 저널리스트로 살아오다가 말기 암을 진단받고 투병과정과 죽음을 앞둔 심경의 변화며 사후 준비과정 등을 써내려간 기록이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에게 닥친 죽음의 예고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그는 줄곧 “왜 내가 불치병에 걸렸지? 일도 잘되고 있는데 왜 죽어야 하지? 무슨 죄라도 지은 건가?” 라고 그의 아내를 붙들고 호소했다고 한다. 육체의 통증은 심각해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면서 비통과 회한은 더해만 갔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임종을 바르게 준비하기로 마음을 추슬렀다. 유언장 작성부터 묘지 및 장례식장 선정과 장례절차 준비까지 사후 일체를 기획했다. 심지어 영정사진을 고르고 입관 때에 입을 복장까지 선택할 정도로 세심한 준비에 집중했다. ‘홀로 남을 아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40대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죽음을 앞둔 심경의 변화는 어떤지’ 자기 죽음을 정보 발신지로 활용되기를 바랐고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특유의 쾌활한 기질을 발휘해 조문객들을 향한 인사말에서 “인생의 조기 은퇴제도를 이용하게 됐다.”라는 유머를 더하는 성숙한 여유를 보여주었다. 40일간의 집필과 사후준비를 마친 그는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장에는 1000명의 조문객이 동참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일본의 인터넷서점 ‘아마존’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엄청난 갈등과 번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사관을 관철한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 장의업체 관계자는 “가네코처럼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은 없었다.”고 술회했다.
임종에 대한 본보기는 가끔 접하는 사례이다. 그러나 내가 가네코의 사례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장의업체 관계자의 술회이다.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 ‘정면’이 주는 어감이며 뜻은 그 얼마나 적나라하며 의미심장하랴! 비겁하게 뒤로 물러나지 않고 앞을 직시하는 그것, 바로 죽음 앞일 것이었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곰곰 생각해본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온 사람일까. 아니면 부귀영화에 한껏 취해 원도 한도 없는 사람일까. 적어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성찰이 부재한 소견일지라도 혹시 정직과 성실로 ‘견결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닐까, 헤아려본다. 스스로 정직하지 않거나 삶을 허비하고 소홀히 여겨 불성실하게 살아온 이가 어찌 굳고 깨끗한 삶을 추구할 수 있었겠는가? 죽음을 대면하는 힘은 축적된 내면의 성찰에서 비롯되리라. 성찰은 거짓과 불의와 허울이며 가식을 스스럼없이 집어던질 때 얻을 수 있는 덕목이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그만큼 삶을 정직하고 용기 있게 살아왔다는 증거일 테니까.
중간지대의 그분들은 이달도 어김없이 예의 무심한 표정들이다. 간혹 활짝 웃거나 치매에 사로잡혀 횡설수설하거나 또 간혹 일그러진 표정으로 통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분들에게 ‘엔딩노트’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지체가 부자유스럽고 말도 어눌하며 정신마저 혼미해진 그분들이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삶이 존엄하듯 죽음 또한 존엄하지 않을 수 없다. 백발의 할머니가 치아가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은 잇몸을 훤히 드러내며 환하게 웃을 때 나는 이제 막 자궁을 벗어난 태아의 느낌을 받는다. 그 생명의 신비 말이다. 드러난 잇몸은 젖니 전의 분홍빛과 흡사하다. 세상에 올 때처럼 우리는 너나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이왕이면 축복과 환호 가운데 생명이 왔듯 축원과 배웅 속에 그 생명이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고마워요. 담에 또 봐요.”
비교적 양호한 상태의 어느 할머니가 먼저 내 손을 잡아주신다. 갸름한 얼굴은 주름투성이고 그 내민 손등은 쭈글쭈글하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얇고 가볍다. 거칠 것 같던 손마디가 세월의 풍상에 닳고 닳아서인지 부드럽다.
“예, 다음에 또 뵈어요. 꼭 뵈어요.”
그분과 나는 다음번을 약속한다. 얼마간은 뵐 수 있으리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주 크게 웃는다.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때 그분이 엔딩노트를 작성하셨으면, 하고 바라본다. 느릿느릿 출입문을 나서는 그분의 뒤태를 보며. 허수아비이듯 허청허청 걸어가는 그분의 뒤를 언젠가는 나도 따라가야 할 테니까.
그분들은 늙고 병들고 기운 진하여 이제 저 생을 바라보는 중간지대에 머물 뿐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서성이는 그분들이 바라보는 지점을 나는 정확하게 가려낼 수 없다. 그저 어렴풋하게 삶과 죽음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삶이 죽음을 예비하듯 죽음 또한 삶을 위무할 수 있으리라, 다만 그리 짐작하는 것이다. 일상을 죽음 준비로 일관하자고 주장하는 유난은 피하고 싶다. 그저 물 흐르듯 순리를 따라 견결하게 살아가다 보면 누구든 여기 중간지대의 갈림길에 이르게 되리라. 그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그리 고백하면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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