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만의 세상은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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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행을 두 달여 앞두고 있는 성년후견제도와 관련해서, 가시지 않고 제기되고 있는 논란의 핵심 쟁점은 자기결정권과 관련된 문제다.
쉽게 얘기해서 성년후견제도 시행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 제도가 지적장애인 같은 발달장애인들의 선택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나쁜 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성년후견제도 시행을 반대하는 이들도 공개적으로 그리고 극렬하게 이 제도 시행을 가로막고 나서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추측해 보면 성년후견제도를 시행하지 말고 지금처럼 자기 판단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들을 내버려두자고 하기에는, 발달장애인들이 놓여 있는 현실이 너무나 비참하고 척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예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지난 4월 충남 아산시의 한 개인 인가 시설에서 20여 명이 넘는 장애인들을 구해내고 시설을 폐쇄시켰다. 시설에는 발달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자기 결정권을 가진 지체장애인들도 다수 수용되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국적 상황에서 오히려 성년후견제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추상적이 아니라 눈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우리나라 현실에서 판단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을 잡아 가두고, 비인간적 대우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시설들은 절대 없어지지 않고, 앞으로도 사라지리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시설들이 겉으로 포장을 어떻게 하든, 시설 운영자들에게 장애인들은 먹이사슬 구조에서 쉽게 돈이 되는 상품으로 인식되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은 돈이 되는 상품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치매 노인을 요양병원에 내다 버리듯이 한계상황에 달한 가족들이 장애인들을 시설에 갖다 버리는 일이 없다고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다만 과거와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과거에는 가족이 아무 대책 없이 장애인들을 내다버렸다면 지금은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연금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장애인들을 시설에 내다버리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가족들이 장애인들을 내다버리면서도 떳떳하고, 큰 규모의 복지시설도 마찬가지지만, 시설들은 돈이 되는 상품인 장애인들을 떠안는 걸 반가워하고 있다.
회한을 감출 수 없는 건,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오랜 시간동안 싸워온 결과가 무척 초라하기 때문이다. 싸움의 결과로 얻은 건 기초생활수급비와 적은 장애연금과 활동보조인서비스 제공뿐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까지고, 장애인들의 지역사회에서의 자립생활, 특히 판단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들의 지역에서의 자립생활은 아직은 요원한 꿈일 뿐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은, 사회가 분절화 되고 개인화가 심화되면서 드러나는 현상 중 하나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대놓고 차별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을 아예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길한 예감이지만, 이런 사회 현상이 앞으로 자기 판단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의 지역에서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장애인가, 특히 판단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들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려면 싫어도 비장애인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어쩌면 발달장애인들이 지역에서 살기 위해서는 비장애인들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비굴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설령 비굴하더라도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아직까지는 장애인들만의 세상이 가능하지 않고, 가능하더라도 그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7월부터 시행 될 성년후견제도는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는 장애인 운동 원칙에 분명 위배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운동 원칙을 내세우며 시행을 반대하기에는, 지금 판단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의 삶이 너무 힘들다.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되면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장애인 개인이 어쨌든 조력자와 친구를 가지게 된다. 이 점을 긍정하고, 반대보다는 조만간 구체화 될 성년후견제도가 판단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간 단계로 기능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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