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의 공동선 가치와 복지국가
본문
1. 자원봉사(Volunteer)와 디아코니아(Diakonia)
현대사회에서 자원봉사라는 말은 주로 사회복지분야에서 자발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원봉사자(Volunteer)라고 불렀다. 미국사회사업가협회는 자원봉사자를 ‘개인, 집단,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보수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이를 예방하고 통제하거나 개선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원봉사자를 ‘사회복지분야에서 자발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최근에는 공공복지분야에서도 그 사업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 사업을 돕기 위하여 자신의 기능과 시간을 자발적으로 무보수로 제공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그들의 대다수는 다른 본업을 갖고 있다’로 정의하고 있다.
다음으로 ‘디아코니아’는 희랍어로서 자발적인 섬김과 봉사를 뜻하는데, 이 말은 주로 서양 기독교에서 예수의 정신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디아코니아는 종교개혁 이후 두 가지 형태로 발전되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봉건영주들에게 디아코니아를 국가의 의무가 되게 했다. 이후 지금까지 독일과 북유럽국가들에서 디아코니아는 학교 교육에서 의무교육이 되었고, 국민의 기본 소양이 되었다. 서유럽국가들이 복지국가가 된 것은 바로 이 디아코니아 정신이 국가와 국민의 기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개혁자 칼뱅은 디아코니아를 시민 개인의 덕목으로 삼았고, 영국과 미국은 이런 칼뱅의 전통을 따라 디아코니아를 시민의 기본 덕목, 사회적 책임이 되게 했다. 영국과 미국의 사회복지는 이런 정신에 근거해서 개인의 인도주의적 자선의 덕목으로 발전했다. 이런 연원 때문에 영국과 미국에서는 자원봉사활동이 인도주의에 근거한 자선적 복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자원봉사는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지위를 누리려는 직업적, 명예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공동선에 기초한 자발적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자선적 복지활동과 자원봉사는 인도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높은 도덕성에 근거한 공동선의 활동이지만 본래의 뜻과 달리 가진 자가 못 가진 열등자에게 동정적, 시혜적 정신으로서 베푸는 일시적 행동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곧 자선적 사회봉사와 사회복지에는 시혜자와 수혜자 간에 차별적 우월의식이 존재하고, 시혜자가 수혜자에게 군림하는 병폐가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자원봉사와 사회복지의 내용이 수용자의 필요에 따르기보다 시혜자의 형편과 필요 때문에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되었다. 이 결과 자원봉사와 사회복지에서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수용자, 수혜자를 위해 존재하기보다 도리어 수혜자가 봉사자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모순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동시에 자원봉사와 자선적 복지 활동을 직업화시켰고, 직업화된 자원봉사자와 사회복지종사자는 봉사와 헌신을 강요당하게 되고 심지어 열등한 저임금노동자 취급을 받게 되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 사회복지공무원들이 격무와 저임금에 못 견디어 자살하는 일이 계속 발생하는 것도 사회봉사와 사회복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봉사와 사회복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선한 의지인 인도주의 정신에 근거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주관적 가치와 판단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하는 기본권에 근거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인간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받으려면 하늘이 부여한 평등과 존엄의 천부인권, 시민 개인의 소유적 자유를 보장한 시민권,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선 사회권, 세 요소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자원봉사자는 무엇보다 타인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숭고한 내적 가치와 존엄성,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해서 자원봉사자가 되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는 열등의식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사회봉사와 사회복지는 인권, 시민권, 사회권에 근거하여 평등한 사회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숭고한 소명의 일이 되어야 한다.
2. 복지국가의 두 모델
오늘 세계에서 복지국가 모델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서(북)유럽국가 두 가지 형태로 말해지고 있다.
첫째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체제 국가이기 때문에 부와 빈곤을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으로만 생각한다. 따라서 가난은 가난한 자의 게으름과 능력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가난한 자에게 귀속된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리스도교적 인도주의에 의한 자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회사업,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이 사회사업 복지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득 보조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으로서 정부의 여러 사회정책의 한 분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분야별 복지정책은 인도주의적 자선이라는 도덕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것은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빈곤층에게 신분상승의 기회와 희망을 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이런 부스러기 자선 복지는 빈민들이 자신들의 무능과 게으름을 탓하면서 불평하지 않고 국가정책과 부자들에게 감사하고 체념하며 순응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부도덕하고 불의한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시민권으로서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함께 개인의 사적 소유를 보장하는 자유이기 때문에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와 빈곤을 개인의 능력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빈곤의 책임은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귀결되어 사회적 양극화가 점점 더 심화하였다.
실제로 2011년 OECD 보고서는 세계 경제 제1의 대국인 미국이 OECD 국가 중 가장 밑바닥인 한국 다음으로 빈곤계층이 많고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자료를 보면 미국은 인구 15명 중 1명이 미 연방정부가 매년 정하는 최저 연간 생계소득(빈곤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최빈곤층으로, 그 수가 2,046만 명에 달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자유와 기회의 나라, 복지혜택이 많은 최고 선진국으로 3/4세계(20세기까지는 제3세계라고 불렀지만, 이것은 서구제국주의 관점에서의 인식이기 때문에, 21세기부터는 3/4세계라고 한다. 실제로 이들 나라는 지구의 3/4에 해당한다)의 발전 모델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미국을 절대적인 모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OECD 연례보고서는 미국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도리어 OECD 회원국 중 경제 양극화가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양극화와 부의 대물림으로 말미암은 빈곤층 문제가 유럽 국가들보다 심각하며, 양극화 탓인 경제 불평등의 고착화에 따른 빈곤문제도 매우 심각하다고 밝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 대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즈 기고문에서 미국의 사회적 불평등이 100년 만에 최고조에 달했다고 했다. 상위계층의 부를 늘리면 파급효과가 하위계층으로 이어진다는 ‘낙수 효과’(trickle down)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 경제제도는 다른 사회적 약자 구성원들을 희생시켜 부유층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이제 미국은 기회의 나라가 아니며 복지국가도 아니다.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라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다른 유럽 국가들 보다 아주 심하다. 따라서 평등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저해한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도리어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 평등 수준이 높은 나라는 경제도 건전하다. 실제로 평등 수준이 높은 국가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데, 독일과 스웨덴 등 북구가 그렇다.
스티글리츠 교수에 의하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부자들에게는 유리하지만, 중산층, 빈민들에게는 불평등하고 기회가 불리한 제도이다. 반면에 서유럽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소득의 평등 수준만이 아니라 저소득층의 사회적 상승 기회의 수준도 더 높다.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는 평등과 정의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부자들만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체제는 이미 존속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앞으로 새로운 경제체제 및 질서는 평등을 지향하며, 경제가 목적이고 사람이 수단이 되는 시장체제가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고 경제가 수단이 되는 인간을 위한 경제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그동안 사보험에 국한되었던 의료보험을 사회 보험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는데,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의원들 일부도 이것은 미국의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가까스로 합법이라고 승인해서 겨우 이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시민권에 의한 분야별 복지정책을 평등지향의 사회권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서유럽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의 탐욕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 자유 체제인 사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부와 빈곤의 문제를 개인적 원인보다 사회 구조적 원인이 더 큰 것으로 인식한다. 특히 부는 개인의 능력도 있지만 편중된 국가정책, 불평등한 사회구조, 가난한 자들의 희생 등이 더 큰 요인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 정치제도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평등을 지향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은 이런 평등 지향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미국처럼 복지를 자선적 분야별 복지가 아니라 인권과 평등의 사회권에 근거한 통합적인 사회정책을 복지정책으로 시행하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의 사회정책으로서 복지정책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이 되는 교육과 의료 그리고 주거의 평등을 추구하고 있다. 교육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무료이고, 의료도 무료이다. 주택은 국민 다수가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임대주택을 이용한다. 인생의 출발선에서부터 가정의 빈부 차이를 넘어 사회적으로 평등한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의 의료제도는 사보험에 가입한 부유한 계층이 아니면 서민들은 막대한 의료비 때문에 병원에 가기가 어렵다. 그리고 주택도 개인소유 중심이기 때문에 중산층과 서민층은 주택소유와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빈민들은 슬럼가, 빈민촌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학교제도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로 구분되어 있는데, 막대한 교육비를 지급하는 사립학교 학생들은 당연히 사회의 상류층을 선점하고, 공립학교 학생들은 중하위층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통념처럼 되어있다. 따라서 미국 학교 교육은 기회균등과 기회의 사다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미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계층이 결정되고, 같은 공립학교라도 부유한 지역의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 사회적 상승기회를 선점한다. 그래서 미국의 교육제도는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빈부를 대물림하는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이런 학교의 불평등 재생산은 불평등한 사회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심지어 진보적 교육사회학자들은 이런 미국의 학교정책은 보편적 제도가 아니라 내국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심화시키는 불의한 제도라고 비판한다.
반면에 서유럽 국가들의 학교는 소수 종교적 사립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공립학교이다. 이들 학교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어느 지역에 있거나 모두 평준화되어 있다. 학교 간에 서열이 없다. 따라서 학생들도 전국적으로 서열화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보다 학력차별이 별로 없다. 특히 독일과 북유럽의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지식만이 아니라 실사구시의 교육을 함으로써 이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전문 노동력으로 자기를 성취할 수 있는 의욕과 실력을 북돋아 주고 있다. 이렇게 서유럽 나라의 학교 교육은 기회가 평등하고 노동생산성과 선순환 되기 때문에 교육이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적 평등의 수준을 높이고 있다.
이처럼 서유럽국가들의 복지정책은 사회정책의 한 분야가 아니라 사회권에 근거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통합적인 사회정책이다. 따라서 이런 서유럽국가들을 복지국가라고 말하고 미국은 복지국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3.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복지국가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 빈부의 원인과 책임을 개인에게 국한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자선적 분야별 복지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 그리고 사회복지의 모순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저임금, 저곡가의 군사독재 개발정책에 의한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이 보편화돼 있어서 미국보다 양극화와 불평등이 더 심하고 사회복지도 더 열악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빈곤과 부의 문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이념 문제를 넘어 현실적으로 개인보다 사회 구조적 요인과 편중된 국가정책에서 더 많이 비롯되고 있다.
작년 4월 우리나라 중소기업중앙회가 20~60대 1,000명을 대상으로 빈부에 관한 국민의식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자료를 보면 이런 현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기업 성장의 원인에 대한 질문에서, 스스로 노력은 3.8%에 불과하고 정부의 대기업 중심 정책이 75.6%, 중소기업의 안정적 협력과 공급이 11%, 국민의 희생과 성원이 9.6% 등으로 나타났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발전을 했는가 하는 질문에서, 매우 그렇다가 2.6%, 약간 그렇다가 16.6%이고, 전혀 아니다가 31%, 별로 아니다가 43.7%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불균형 성장을 한 이유를 묻는 말에서, 대기업중심의 정부정책 60.1%,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갑을(甲乙) 문화 31.2%, 중소기업에 대한 낮은 사회인식 5.5%, 중소기업의 역량 부족 3.2% 등으로 나타났다.
또한, 작년 6월 참여연대가 조사한 자료를 보면 2010 제조업에 대한 정부 조세지원액이 총 8조 4321억 원인데, 이 중 10대 재벌에게 5조 원(59.1%), 대기업에 2.1조 원(25.2%), 중소기업 1.3조 원(15.7%)을 지원했다. 이중 삼성그룹에게만 2.9조 원(33.9%)을 지원했고, 그중에서 삼성전자가 1조 8442억 원(21.9%)을 지원받았다.
법인세율은 보면 10대 재벌은 15.1%, 삼성그룹과 삼성전자는 11.7%, 11.9%, 중소기업은 22.0%였다. 중소기업이 재벌과 삼성그룹의 두 배에 해당하는 법인세를 내고 있다.
그리고 2006년부터 11년까지 정부가 전기요금을 할인해준 금액이 약 3조 8000억 원인데 그중에서 삼성이 7500억, 현대자동차 5200억 원을 할인 혜택 받았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재벌들과 부자들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정부의 특혜로 이익은 사유화하고 비용은 사회화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주거와 기업경제 환경면에서 재벌과 부자들은 상하수도와 전기시설, 도로와 가로등 및 가로수, 민생치안 경찰력 등 막대한 사회복지혜택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복지혜택은 서민과 빈민들에게만 주어지고 부자들과 재벌에게는 전혀 없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복지 병, 도덕적 해이 문제도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의 확대보다 편중된 국가정책으로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받고 있는 재벌, 대기업, 부자들에게서 더 많이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이지만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에는 분명히 사회민주주의, 사회국가 요소가 병존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는 절대왕정체제에 대한 시민혁명의 산물이다. 그래서 국민의 자유, 재산, 생명에 대한 개인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간섭을 될 수 있으면 배제하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민주주의 사회국가는 자본계급에 대한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사회적 평등을 원칙으로 생존보장, 완전고용, 노동력보존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 중 특히 국민의 기본권을 적시한 헌법 31-35조는 자유민주주의 시민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사회권에 근거하고 있다.
제31조 교육권은 1항 모든 국민의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2항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 3항 의무교육은 무상, 4항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 보장, 5항 국가의 평생교육 진흥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제32조는 노동권 보장으로, 1항은 근로의 권리로 국가는 사회적, 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 증진과 적정 임금의 보장, 법률로 최저 임금 보장, 2항은 국민의 근로의무, 3항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하고, 4항 여성 근로의 특별한 보호와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서 차별 금지, 5항은 연소자의 근로에 대한 특별한 보호, 6항은 국가유공자, 상이군경과 및 전몰군경의 유가족에 대한 우선 근로의 기회부여 등을 명기하고 있다.
제33조는 노동3권과 의료권에 대한 보장으로, 1항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자주적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2항 공무원의 노동 3권 보장, 3항은 의료권으로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34조는 사회복지 보장으로, 1항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2항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국가의 의무, 3항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한 국가의 책임, 4항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국가의 의무, 5항 신체장애자 및 질병, 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보호 의무. 6항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책무를 명시하고 있다.
제35조는 환경권과 주거권에 대한 조항으로, 1항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2항 환경권의 내용과 행사에 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 3항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과 이후 군사정권은 헌법에 보장된 사회권으로서의 국민기본권을 모두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개인의 시민권으로만 해석했다. 이것은 독재체제 원인과 함께 우리나라 법조인들의 대다수가 미국식 교육을 받은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이 결과 그동안 우리 국민은 헌법에 있는 평등한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도리어 이 법에 따라 권리를 침해당하고 박탈당했다.
이런 우리나라 현실에서 2010년 이후 무상급식 논쟁을 통해 ‘보편적 복지’가 복지정책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이제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계기로 ‘보편적 복지’ 정책을 주장했던 야당은 물론 복지 병 운운하며 반대했던 정부와 여당도 ‘보편적 복지’를 복지정책의 금과옥조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하고 불의한 경제체제와 빈곤을 양산하는 사회체제 문제를 함께 생각하지 않고 사회정책의 한 분야별 복지로서 빈자와 부자 모두에게 확대 적용되는 ‘보편적 복지’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일시적일 뿐 아니라 빈민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사실 ‘선별적 복지’, ‘보편적 복지’라는 용어는 사회복지학의 전문용어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언어로 사용되는 말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우리나라 복지정책은 미국의 자선적 복지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갖가지 차별과 사회격리적인 반인권, 반사회적 가치와 방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소득지원과 수급확대만을 목표로 하면 도리어 사회적 불의를 용납하고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재정 악화를 초래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박근혜 정부가 보편적 복지국가, 맞춤형 복지국가를 대선공약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정부 출범 이후 이 공약을 이행하려고 하는데 국가재정과 형평성 문제가 발목을 잡아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진정한 복지국가로 발전하려면 빈곤과 부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사회복지와 복지국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평등지향의 사회통합 복지정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4. 사회자원봉사와 사회적 자본 육성
오늘의 세계는 그동안 성장과 경쟁만 추구하다가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국내외적으로 빈부격차가 더욱 극대화되고 이에 따른 갈등이 도리어 성장에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협동하는 공공심 없이는 자본주의도 더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변화된 새로운 세계 환경과 이에 따른 자본주의 경제 인식이 빠져 있다. 이제는 경제민주화를 하지 않으면 빈곤계층만이 아니라 부자와 대기업도 망할 수밖에 없는데, 재계와 부자들은 이것은 사회주의 발상이고 기업과 자기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재벌과 부자들이 탐욕 경쟁에 묻혀 있어서 경제민주화가 되어야 인간다운 사회가 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가능하다는 선진국, 세계경제의 경험을 우이독경 식으로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재벌과 대기업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zero-sum 게임에서 plus-sum으로 win-win 하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소기업과 골목상권이 살아나고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되고, 분배정의를 통해 경제성장도 지속하고 사회적 평등 지수와 행복지수도 높이는 것이 된다.
특히 지금까지는 자본주의에서 물질적 소유(material capital)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타인에 대한 관용과 포용, 신뢰와 배려, 소통과 합의 등의 ‘사회적 관계 자본’(social capital)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커뮤니티, 공동체 지표가 아주 낮고, 집단 간의 관용성은 더욱 낮고, 일과 삶의 조화로 나타나는 ‘삶과 일의 균형’(work-life balance)은 최하위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IT가 최강국이고 인터넷, SNS 활용도 선두국가이지만 이것들이 커뮤니티 형성에 도움이 되기보다 더 많은 갈등을 촉발시키고, 심지어 묻지 마 범죄행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로부터 정이 많고 이웃사촌이었던 우리 사회가 이렇게 비인간화 사회가 된 것은 오랜 역사적, 사회적 요소가 있겠지만 특히 일제식민지, 분단 해방, 6.25 동족상잔 전쟁, 군사독재로 점철된 근현대사 100여 년 동안의 가난과 억압,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한 경쟁의 출세주의가 낳은 병폐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런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병폐를 극복하기보다 경제제일주의, 출세 제일주의를 앞세워 인간의 인간다움을 길러주어야 할 학교마저 친구도 적으로 삼아야 하는 살인적 경쟁의 장이 되게 했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금융위기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높이 평가받고 있는 시카고대학의 라구람 라잔(Raghuram Govind Rajan)교수가 ‘폴트 라인’(fault line)이란 책에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중요한 요소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미국의 금융위기는 표면적으로는 월가의 탐욕과 정부의 방만한 신용대출(비우량 주택담보 대출)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지진이 일어나는 단층선 밑을 보면 서서히 진행된 소득불균형 심화와 사회안전망 약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했다. 라잔 교수는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조속히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 중요했던 것이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복지국가 기반과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더욱 인간다운 사회가 되고 진정으로 모든 국민이 행복한 복지국가로 발전하려면 인간의 인간다운 가치회복과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관용과 포용,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협력하는 공공심, 인권과 사회정의, 소통과 합의, 공동체 의식과 국민통합 그리고 평화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적 자본을 육성해야 한다.
이런 일이 바로 사회자원봉사자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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