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현금지급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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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행되고 있는 활동보조인 지원제도에서, 중증장애인이 최대한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약 월 500시간으로 알고 있다. 이 시간을 돈으로 나누면, 시간당 단가가 8천 원이니까 8천 원에다가 500시간을 곱하면, 단순 계산해서 월 4백만 원이라는 급여가 한 중증장애인에게 지급되고 있다.
만약 정부가 이 급여를 바우처 형식 말고, 또 중개기관을 거치지 않고, 장애인에게 직접 현금으로 지급해서 장애인이 급여로 활동보조인을 고용하든 말든, 여행을 가든 말든 알아서 쓰라고 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현실에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최근 국내에 소개된 영국의 현금지급제도는 이 불가능한 얘기가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제도를 국내에 소개한 성공회대 이동석 연구원에 따르면 현금지급제도 도입 필요성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지금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정책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장애인 복지 정책은 정부가 장애인을 선별하여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주는 시혜적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도입이 유력시 되는, 장애인 복지의 세계적인 추세인 사회적 모델에 따른 장애인 복지 정책은, 장애인이 일방적으로 복지 혜택을 받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복지정책에 참여해서 자기결정에 따라 무엇인가를 선택해서 받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장애인의 자기선택권과 결정권 보장 정책이라고 부르는데, 이 정책 시행이 우리나라에서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 현재 정부가 장애인에게 여러 가지 복지혜택을 주고 있는데, 그 복지혜택을 전달하는 통로와 방식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활동보조 지원제도는 지금처럼 중개기관을 거치는 방식 대신, 장애인에게 직접 현금을 지급해서 활동보조인을 고용하게 하고, 보장구 건강보험 급여 적용도 보험 급여 대신 장애인에게 직접 현금을 지급해서 장애인이 어떤 보장구를 살지 말지 선택권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다. 나아가 현금지급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장애인이 지급 받은 현금으로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거나, 공연을 보거나 상관없이 사용 영수증만 첨부하면 된다니까, 우리나라도 장애인의 선택권과 결정권 보장을 위해,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복지 혜택과 서비스 총량을 최대한 키운 다음 그총량을 모두 장애인이 현금으로 지급받게 하자는 게 영국의 현금지급제도를 국내에 소개한 학자들의 제안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소감이지만 현금지급제도 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건 영국에서 이 제도가 왜 시행됐는지 그 배경이다.
가령 활동보조인 지원 제도를 예로 들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영국에서도 장애인들에게 활동보조인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요즘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갑과 을의 관계를 대비해 살펴보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갑은 사회복지사 등 소위 복지 전문가들이고 을은 장애인였다.
갑인 전문가들이 장애인을 사정해서 누가 어떻게 언제 장애인에게 활보 지원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 따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장애인은 그 결정에 선택권을 박탈당한 채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복지서비스 제공에 있어서의 갑과 을의 관계는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현실을 보면 우리나라도 활동보조인 지원 서비스를 비롯해서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모든 서비스는 소위 복지 전문가들의 사전 조사와 평가에 의존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정작 당사자인 장애인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전문가들이 일방적으로 복지 혜택을 결정하면서 장애인들의 소외감은 더 커지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불평등한 권력 관계, 장애인 복지에서의 갑은 복지전문가, 을은 장애인라는 나쁜 권력관계를 바꾸자는 게 논의되고 있는 현금지급제도인 셈이다. 모르긴 해도 영국의 현금지급제도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가슴 뜨끔해 할 사람들이 여럿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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