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남은 아이에게 뭐라고 편지를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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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신을 1987년에 부산의 ‘형제복지원’이란 곳에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는 그 사건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지만, 사회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시설에서의 인권침해 문제를 활동의 주요 내용으로 삼다 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벌써 25년 전의 일이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더 듣기도 전에 ‘왜 지금 와서 그 사건을 얘기하는 거지? 뭘 어쩌라고?’ 하는 답답함이 먼저 밀려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솔직히 뭔가 일이 커질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냥 대략은 안다”고 답했는데, 수화기 저 너머에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제가 그 피해자입니다. 근데 너무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한종선(남·38세)이었습니다.
제가 활동하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으로 한종선 씨가 처음 전화했을 때, 초기상담은 다른 동료가 받았습니다. 그 활동가는 본인이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으니 다른 사람이 대신 맡아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냥 상황만 알아볼 요량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메모의 내용을 살펴보니 “억울하다, 지금 국회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국가에서 나 같은 사람의 피해보상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담당자가 바뀌었으니 이제 상담 창구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고 내용이 더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한종선이란 사람의 목소리는 담담했습니다. 사투리가 약간 들어가 있는데 격앙되지도, 호소하는 투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약간 냉소적이게도 느껴졌습니다. 저희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내용을 좀 제대로 검토해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사건으로 자신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으며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억울한데, 당시의 가해자였던 박인근(당시 형제복지재단 이사장)이란 사람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화통화에서 간절함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뒷이야기가 계속 목에 가시처럼 걸려들며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건 무슨 얘길까? 그리고 가해자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고? 어떻게? 왜? 25년 동안, 아니 25년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처해 있을 위치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는 한종선 씨의 말은 뒤틀려진 한국 사회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궁금증은 더해만 갔습니다.
한종선 씨는 거두절미하고 당시 형제복지원을 운영했던 박인근이란 사람이 여전히 복지재단의 이름만 바꾼 채 장애인거주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형제복지원에서 당시 고아시설인 ‘소년의 집’에서 살았고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건설직 노동자로 살다가 허리를 다쳐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집이 구미인데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국회 앞에서 24시간 잠을 자며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투에서는 간절함보다 담담함이 느껴졌지만, 그의 현재 일상모습에서는 끈 없는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며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기쁨과 희망이란 것이 도통 발 디딜 틈 없이, 대신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을 때 나타나는 표현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말을 더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종선 씨의 피해 사실은 너무나 오래 전 사건이고 이미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기 때문에 ‘글쎄…’하는 불가능의 느낌이 더 강해 맥이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부류의 상담은 십중팔구 그 어디서도 해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여전히 장애인거주시설을 운영하는 등 사회복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권유린을 가한 사람이 감옥에 다녀온 후 다시 복지사업을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요. 2012년을 시설에서의 인권침해 역사를 기록해 볼 요량으로 소록도 인권기행도 다녀오는 등 나름의 역사기록과 정리를 중요한 활동의 꼭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현재진행형’이란 이야기는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료를 검토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고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한종선 씨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기독교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훌륭한 사회복지사업가로 변신해 있었고, 사랑, 봉사, 희생이란 아름다운 가치를 지닌 단어를 입에 올리며 기름진 얼굴로 웃고 있었습니다. 2012년 현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 곧바로 과거 형제복지원 사건을 검색해보았습니다. 25년 전 사건이고 전문 기사검색 사이트에서의 검색이 아니니 나오는 내용은 별로 없었습니다. 일단 한종선 씨가 말하는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의 문제를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런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때마침 저희 발바닥행동에서 법률연수를 하던 사법연수생이 있었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문을 구해 법률 검토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공부하고 있는 친구이니 실제 법률가에게도 내용을 전달해주고, 우리가 현재 뭘 할 수 있을지 검토를 부탁했습니다. 그때부터 만나는 법률가 모두에게 이 사건의 내용과 사실을 알렸습니다.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했습니다. 모두가 “휴…”라고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끝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종선 씨가 누군가로부터 희망의 답변을 기대한 것처럼, 저 역시 “Yes!”란 답변이 너무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습니다. 공소시효란 것이 있고, 박인근이란 가해자는 이미 2년 7개월 형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죄로 다시 기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보상 부분 역시 국가폭력이란 점이 입증되어야 하고 당시 기소내용을 뒤집는 뭔가가 나와야 가능한 것인데, 재조사할 수 있는 명분이나 여론 등이 형성되지 않으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고민은 깊어만 갔습니다. 변호사들에게 조목조목 자세하게 설명이 붙은 7~8장 장문의 서류를 받고서도 한동안 한종선 씨에게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포기하십시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고, 한 줄기 기대마저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고민하고 있는 저를 보고는 사법연수생인 그 친구는 서류를 고쳤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너무 건조하게, 도식적으로 문서를 썼다고 말입니다. 그 문서 하나에 삶이 희망이냐, 절망이냐를 가늠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식의 검토의견서는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 마음이 참 고맙고 예쁘더군요.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뭔가 할 수 있다. 할 게 있다!”는 이야기를 찾지 못하는 이상 돌려치나 매치나 한종선 씨에게는 똑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KBS의 ‘추적 60분’ 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이사장을 취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부산저축은행 사건에 그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가족이 400여억 원이 넘는 돈을 대출받았는데, 이름만 바꾼 채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의 이름으로, 사회복지사업의 하나로 대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회복지법인이 사회사업의 명목으로 대출을 받을 때에는 부산시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 절차를 무시했음에도 대출이 승인되었고, 목적 사업에도 쓰지 않았다는 부정과 비리의 내용이었습니다.
언론·부산시의원의 조사와 추궁으로 검찰 조사·부산시 감사가 시작되었으니, 그 결과는 앞으로 지켜봐야 하겠지만, 추적60분 팀도 의아해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사회복지법인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정과 비리의 역사,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죠. 보호의 명분 아래 이미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 잡은 ‘시설’을 가능케 하는 구조와 그 침묵의 카르텔에 대해서 말입니다.
방송은 방송대로 나가겠지만, 빨리 한종선 씨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긍정적인 대안을 만들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사이에도, 그는 여전히 국회 앞에서 24시간 농성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일단은 만나서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미안함을 달래고 싶었습니다.
전화를 걸었더니 구미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1987년 당시 형제복지원에 같이 있었던 아버지와 누나를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면서 20년 만에 찾게 되었는데, 그분들이 그 후 지금까지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두 분을 한적한 곳에서, 그리고 같은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연고도 없는 구미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모르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살고 있겠지’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복지원을 나온 이후 쭉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었다니…. 지금도 한종선 씨의 그때 그 심경을 헤아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충격과 분노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폭력과 학대, 성폭력의 대가가 그 두 사람의 정신을 다른 세계로 몰아넣었고 여전히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야 하니까요. 아무런 치료도 보상도, 그 누구에게서도 “네 잘못이 아니야”란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요. 한종선 씨의 누나와 저는 나이가 같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년배로서 느껴지는 감정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25년간 바깥을 나가본 적은 딱 3개월(한종선 씨가 다시 누나를 만났을 때 누나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고 그 후 3개월 동안 병원에서 나와 집에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피부가 아이처럼 보드랍고 물컹했습니다. 악수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한종선 씨가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은 바로 누나인데 말입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내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요. 하루 한 끼 먹고 지낸다는 말에 무조건 고기를 먹자고 졸랐지만, 그는 이야기하느라고 밥도 대충 대충이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보통사람의 두 배나 되는 양을 먹는 걸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원래 그렇게 먹는다고 합니다. 국회 안 구내식당에서는 “형제복지원에서도 이렇게 큰 식당이었어요. 그래서 큰 식당과 배식판에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자꾸 그때가 떠올라서…”라고 말하면서도 내내 웃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상의 모든 것이 새록새록 다시 형제복지원 때의 일들과 겹쳐진다고 했습니다. 그가 접하는 모든 것들은 형제복지원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38세 남성의 몸을 하고 있지만 9살 어린 나이의 과거 속에 살고 있게 하는 듯했습니다. 그 참혹한 아픔이 순간순간 전해져왔습니다.
▲ 한종선 씨가 집필한 <살아 남은 아이> |
그런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가장 바라는 건 누나와 아버지와 시골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허리를 다쳐 힘든 일을 할 수 없고 누나와 아버지를 돌봐야 하니 바쁘고 험악하게 돌아가는 도시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합니다. 조용히 세 식구가 가축이나 기르면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누나가 사람들과는 소통이 어려워도 동물들과는 교감할 수 있을 거라면서요.
그다음은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잊히고 지워진 일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형이고, 고통받는 피해 당사자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보상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가해자였던 박인근이란 사람이 몇백 억대의 재벌 못지않게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건 정말 볼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기록’이란 것을 선택했습니다. 1인 시위하던 국회 앞을 지나가던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전규찬 교수가 내용을 궁금하게 여기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기록’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지나간 일이라 생각한다. 당신 같은 사람이, 삶이 존재한다는 걸 모른다. 국가의 잘못이다. 한국 현대사의 과거사 문제이며, 목소리 잃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규찬 교수의 제안이었다고 합니다.
둘의 만남은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아니지만, 마치 서로가 대화하듯, 당사자로서 ‘형제복지원’에서의 사건을 기록하고, 형제복지원 사건이 갖는 의미를 사회적, 문화적, 인문학적 관점에서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시설인권운동을 처음 시작한 인권재단 사람의 이사인 박래군 씨가 ‘사회복지시설’의 비리와 부정, 인권침해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살아남은 아이」(문주 출판사)란 책입니다.
괴물이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괴물을 만드는 사회, 복지사업, 사회정화란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의 실상, 숨죽여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기록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이 책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11월 말에 책이 출간되었지만, 책으로 못한 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자와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일반 독자들이 찾아옵니다.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치유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한종선 씨는 당차게 말합니다. “그게 피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관점 차이”라고요. 책을 내고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며 격려하고 있는 게 힘은 되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이 변하거나 누나와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고 정부 당국에서조차 침묵하며 외면하고 있어 여전히 고통스러운 나날, 잠 못 드는 나날을 지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희 또한 뚜렷한 뭐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법률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법을 바꾸면 됩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가해자가 용서를 빌지 않았고 피해자의 고통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면 사과하게 하고 역사를 되돌리면 됩니다. 어쩌면 25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시작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용기 내어 “내가 지금 여기 있다!”고 외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역사를 바꾸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당사자입니다.
「살아남은 아이」의 부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입니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의 공모자로 남을 것인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며 역사를 바꾸는 사회의 주체로 남을 것인가는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2013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 씨에게 편지 한 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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