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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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월가에서 새 한 마리가 서쪽으로 똑바로 25마일(40키로미터)쯤 날아간다면, 제가 살고 있는 뉴저지주 서밋(Summit)이라는 동네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나 날개가 없고, 강을 걸어서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차를 타고 이 거리를 왔다 갔다 합니다. 저 역시 지하철과 통근기차를 이용해서 출퇴근을 하는데요, 이렇게 통근을 한 지도 올해 여름이 되면 10년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아직도 지리를 100% 다 숙지하지 못한 곳이 뉴욕 펜스테이션(Penn Station)입니다. 한국 서울역과도 같은 이곳은, 뉴저지와 뉴욕을 연결하는 통근기차와 뉴욕 롱아이랜드를 왔다 갔다 하는 통근기차들, 그리고 미전역을 순회하는 앰트랙(Amtrak)기차들이 떠나고 도착하는 아주 큰 역입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펜스테이션에서 일어난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에 대해서 제가 근래에 느낀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서울역은 어떤지 몰라도, 펜스테이션에는 집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직접 저한테 와서 도와달라는 이들은 드물지만,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런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곤 했습니다. 반면에, 저와 같이 퇴근길에 자주 이 펜스테이션까지 같이 오는 친구 개리(Gary)는 이런 분들을 지나치지 못합니다. 항상 돈을 주고, 잘 지내라든지 축복한다든지 등의 말을 해줍니다.
그런데 저는 이 회사 동료이자 친구인 개리가 너무 착해서 이런 실수를 항상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이런 분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던 이유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런 사람들은 대개 돈을 받아서 술을 사 마시거나 마약을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쉽게 돈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분들 중에는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돈을 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것을 하나의 직업으로 하면서, 알고 보면 그들에게 돈을 자주 주는 사람들보다 더 잘 사는 이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도움을 요구하고 돈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단체들이 사람들을 시켜서 이런 방법으로 돈을 벌어오게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분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 단체를 돕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이런 분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오만한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열심히 먼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는데, 겉으로 장애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남의 도움만을 바라며 살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렇듯 꽁꽁 얼어붙은 저의 마음에 얼마 전부터 약하게나마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그날도 저는 개리와 함께 펜스테이션에 도착해서 우리 각각의 기차를 타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의 목소리, “Help us(우리를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물론 개리는 돈을 주었고, 저는 모른척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도와달라고 했을까 궁금해서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딸 같이 보이는 두세 살쯤 된 아이와 같이 역 바닥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저는 우선 화가 났습니다. “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개리가 “딸을 봐줄 사람이 없었나보다”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럴 리 없다고 개리에게 반박하려던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에 하나 개리의 말이 맞는다면, 저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아주 불공평하게 불쌍한 그녀를 판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뜨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뉴욕 거리와 펜스테이션 등에서 제가 지나친 많은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속아서 돈을 주게 된다면, 그것은 저와 다른 이들을 속이면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그들 모녀를 만났을 때, 저는 개리와 같이 그녀에게 약간의 돈을 건넸습니다. 그 순간, 이제는 남을 판단하는 마음을 줄이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순규 애널리스트에게 궁금한 점이나 기고 소재에 관해 의견이 있으신 독자분은 dung727@naver.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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