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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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삼십몇 층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턱, 무슨 물건을 내려놓듯. 그러더니 그와 내가 무언의 눈길을 건네는 사이에 쏜살같이 내려가고 말았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막강한 속도감 때문인지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 역시 촌티가 물씬거리기는 마찬가지여서 연실 두리번거렸다. 한솥밥을 먹고 살아온 이력은 그만큼 정서적 결집을 불러오는 모양이었다.
한번 오라고, 핸드드립을 해주겠다고. 발코니에 앉아 커피 한잔을 하면서 남한강 물줄기를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라고 여기며 나선 방문이었다. 오래전부터 A는 자신의 집을 와 달라 요청했다. 일껏 그러마 하고, 대답해 놓고는 어찌어찌 휘둘리며 살다 보니 훌쩍 해를 넘긴 것이었다. 새해 들어 A가 먼저 안부를 물어올 때, 수화기 저쪽에서 입술을 실룩이며 서운해하는 그녀를 상상했다. “선배, 그렇게나 바빠요? 그때가 언제예요?” 그때가… 그때가 언제였던가?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여름 A는 이사를 한다고 전해왔다. 더는 복잡한 서울이 싫다고. 조망권이 좋아서 아침저녁으로 강을 볼 수 있다고. “잘됐다, 여건만 된다면 나도 그러고 싶어.” A의 여유는 그 순간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수십 년 일상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을 휭하니 떠나는 용기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A의 재정적 여유가 부러웠다.
현관을 들어서자 거실 아트월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은은하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춤사위 하듯 가볍고 경쾌하게 걷는 그녀 뒤를 따라 우리 부부는 운동장 같은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를 순회했다. 침실4개·주방·거실·드레스룸·다용도실·욕실2개. 와! 어떻게 청소를 하지? 화려하고 품격 있는 실내가 부럽기보다는 뜬금없이 나는 청소 걱정을 먼저 하고 있었다. 순회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이어지는 다음 걱정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난방비를 어찌 당할꼬? 대한민국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데…. 애국자가 되었을까? 아님, 나는 꼰대가 되어가는 중일까? 스스로도 헛갈렸다.
A는 원두를 갈면서 고급스러운 자신의 공간에 만족감을 표현했다. 우리는 확 트인 창가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며 이야기했다. 지도자의 성별이 중요한 건 아닐 텐데 A는 ‘첫 여성 대통령’을 자주 말했다. 멘붕과 힐링과 레 미제라블이라는 단어들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자 A는 “선밴 여전해. 난 이제 그런 열정이 없어요. 그냥 내 것에 충실하면 될 거 같아”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A가 뭐라 했던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라 했던가! 서글퍼졌다. 아아,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to have와 to be의 딜레마를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을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의 첫 장 첫 문장은 노자로부터 출발한다. 거기에는 ‘도(道)는 존재(存在)이다’라고 씌어 있다. 이십 년도 훨씬 지난 누렇게 바랜 책이 이따금 책상 위로 불려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가치체계의 혼란을 경험할 때이리라. 청년들은 탁월한 스펙에 인간미까지 겸비한 멘토를 찾아 따뜻한 위로를 받기에 급급했고, 층위를 아우르는 힐링 파장은 그 정도가 지나쳐서 동네 아낙들의 친교모임조차 힐링캠프를 자칭하는 지경이다. 과연 멘토와 힐링 열풍은 무얼 말해주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가치가 그만큼 혼돈에 휩싸였다는 징표이리라. 인간사가 뒤섞이어 갈피를 잡을 수 없기에 엄습하는 것은 ‘나약함’과 ‘무력함’뿐이다. 모든 게 결국 ‘나’를 ‘상실’한 결과라고 말한다면 억측일까? 존재를 잃은 그 자리에 소유는 들이닥쳤으리라. 따지고 보면 멘토와 힐링 또한 보이지 않는 ‘소비’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정신의 공허는 어찌 보면 가장 사치스러운 인간의 일면인지도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그것… to be와 to have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요원한 난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생존양식은 to be, 즉 ‘존재’여야 한다고 일갈한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평생을 성실하게 일한 가장이 있었더란다. 단칸방 월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여 열심히 일해서 방 두 칸의 전셋집으로, 다시 밤낮없이 몸이 부서져라 일해 생활이 편리한 아파트를 마련했단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자 화장실이 한 개인 아파트가 불편해지고 또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죽기 살기 일해서 화장실 두 개인 아파트를 샀단다. 그래 이만하면 됐지 싶어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야지 했는데 오매불망 원하던 그 화장실에서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죽게 되었더라는. 말하자면, 그 가장은 변소를 늘려가다 사망한 셈이다. 결국 그 변소에서…. 사실이든 꾸며낸 이야기든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싸하면서도 과연 소유 중심의 삶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생존양식은 존재적 위기감을 극복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곳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화장실을 늘려가다가 죽은, 예의 가장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라고 항변할 자 누구이랴! 과연 어느 사람의 묘비명에 ‘변소를 늘리다 죽다’라고, 쓰여 있다면? 코믹한 묘비명이라고 그저 웃을 수만은 없잖은가. 세월과 함께 누렇게 변색한 책 <소유냐 삶이냐>를 새해에 꺼내 든 것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부화뇌동하는 대세에 아마도 나 역시 꽤 갈팡질팡한 모양이다.
그날, A의 고층 아파트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라본 남한강은 꽁꽁 얼어 있었다. 푸른 물줄기를 기대했던 나는 적이 실망스러웠다. ‘내 것’에 충실하겠다던 말대로 A는 자신의 머그잔을 꽉, 움켜쥔 채 한동안 얼어붙은 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목적과 의식이 도태된, 바꾸어 말하면 그녀에게서 사라진 열정은 어디서 회복할까? 푸석한 머리카락과 각진 얼굴선, 그리고 눈 밑에 드리워진 다크서클은 회복의 기미를 차단하고도 남았다. 화려하고 세련되고 넓은 그녀의 공간과 그녀 자신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A가 손수 드립한 커피인데 왠지 그윽한 향이 맡아지지 않았다. 차라리, 서울 한복판 그녀의 작은 집―욕실이 한 개였을까?―에서 화장기 없는 민얼굴로 하하 호호, 호들갑을 피우며 끓여주던 인스턴트커피가 그리웠다. 나는 A가 남한강이 내다보이는 그 집에서 충분히 휴식하기를 바랐다. 쉼을 통해 자신을 재충전하여 새롭게 ‘존재’하기를 바랐다.
‘A? 네 것이 아닌 너를 찾기 바란다. 너를 찾아서 이제는 오직 너에게만 충실해 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삼십몇 층에서 또다시 초고속 엘리베이터는 우리 부부를 한순간 1층에 내려놓았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A에게 하고픈 말은 아직도 변소가 한 개뿐인 내 집에 도착하면 차분하게 문자로 전해야겠다고, 어질어질한 중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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