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본문
덜컥, 가을이 와버렸다.
속절없이 맞이하는 시월은 하늘의 긍휼을 불러오고 남을 만큼 갸륵하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그 하늘을 또 그렇듯 무연히 바라보는 날들이 잦아지면 이윽고 가을은 저마다의 목울대에 물처럼 차오르고 무병이듯 그 가을을 시름시름 앓게 되리라.
쇠락의 기운을 앓아내야만 이 가을을 무사히 보낼 터, 나는 창문을 기웃거리며 저 멀리 가을 산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아침과 한낮과 어스름의 산을. 아침에는 우뚝 청정하고 한낮이 되면 햇빛에 주눅 든 채 적요하다 어스름에는 그만 푸른 기운을 잃어 허허로워지고 마는. 늠름했던 푸른빛을 조석으로 빼앗기다 이윽고 산세가 누르스름하게 변해가면 가을은 제 몫을 요구한다. 수확물을 내어 놓으라고. 파릇파릇했던 봄의 싹들과 여름날에 쏟아졌던 무수한 태양 빛을 거저 준 건 아니라고. 저벅저벅, 가을은 체부처럼 내게 와서 턱, 통지서를 내민다. 내 손에는 봄날의 씨앗과 한여름의 땀내마저 남아 있지 않다. 축 늘어진 빈손을 그저 멀뚱거리며 내려다보면서 나는 아연해지고 만다. 대체 무얼 했나? 어디서 무얼 하다 10월을 만나는 걸까? 열 달은 한 생명을 품기에도 족한 시간일진데…. 봄여름 밝은 날들을 무람없이 보내버린 내 죄과(罪過)를 나는 고해성사하듯 된통 앓고 만다.
도심 속에서 만나는 가을은 지병처럼 심란했다.
가로수 은행나무는 먼지에 절어 샛노랗게 옷을 입지 못하고 고작 누릇누릇할 뿐이었고 나무 아래로 검은 비닐봉지며 전단 따위가 함부로 나뒹굴고 있었다. 가을바람을 거스를 요량인지 소녀들의 옷차림은 남우세스러웠다. 하의실종 패션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대체 이 가을에 저 차림새로 거리를 활보할 만한 이유가 뭘까, 라는 우문을 떨칠 수 없다. 한 공장에서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도무지 식별할 수가 없다. 개성과 취향은 다 어디다 두고 나왔던가? 그러잖아도 쓸쓸한 가을 거리에 말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니체의 초인사상이며 솔제니친의 저항정신을 탐구한다든지 장자와 푸코의 철학적 행복을 읽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이 하 수상하여 요지경 속이라 그런지, 아니면 책 읽기에 심취한 젊은이들이 죄다 공부방이나 도서관에 들어앉아 있어서 내 눈에 띄지 않는지 혹 모를 일이다. 허나, 하늘 높고 청명한 계절에 그 하늘 아래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가치를 티끌만큼이라도 찾아내려고 지난 세대의 젊은이들은 가을 벤치에 붙박여 책을 읽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무슨 망발이냐? 시내 곳곳 북카페는 두었다 엿 사 먹을 건가?, 따져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대거리의 증거물이 전무한 것도 아니다. 말만한 청년들이 막대사탕을 물고 앉아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거나 대개는 삼삼오오 커피에 빵조각을 찍어 먹으며 ‘수다대회’라도 개최한 지경이 북카페의 익숙한 정경이니 이 또한 나만의 ‘꼰대 시선’인지 모를 일이다. 어쩌다 홀로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십 대를 발견하면 그만 벌떡 일어나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픈 심정이다. 게다가 실용서가 아닌 제법 두께가 있는 고전을 볼라치면 나는 그 애가 내 자식인 듯 만면에 미소까지 번지는 것이다. 그만큼 북카페는 책 읽기의 공간에서 물러나 있다. 내가 다니는 북카페만 그런 걸까?
빈손으로 앉아 책장만 뒤적거리면서 가을을 앓다가 남도로 향했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때마침 덕유산 근처에 볼일이 있었던 터였지만 사실 도심을 벗어나고픈 쪽이 더 컸다. 가을바람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거리의 오물들과 마치 영혼을 빼놓은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을볕에 함부로 미간을 찌푸리는 행인들은 가을날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점점 푸르고 높아지는 하늘은 적어도 사람들에게 자숙을 원하지 않을까?
“우와! 쟤들이 볼라벤을 이겼단 말이야?”
“볼라벤뿐인가? 덴빈도 이겼지.”
얼마 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와 나는 덕유산 자락의 어느 마을을 지나갔다. 감나무가 즐비한 동네였다. 과연 감나무마다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동네가 온통 주황빛 일색이었다.
“세상에! 어찌 살아남았을꼬.”
“저 큰 산이 막아주었을 테지. 자, 내리시게.”
그가 길옆 풀밭에 차를 세웠다. 운전 중에 힐끔힐끔 내다보는 게 아마도 성이 차지 않았을 터다. 그렇도록 막강했던 비바람을 이기고 실하게 제 몸을 익히고 있는 감나무의 무성한 감들을 우리는 경외심을 가득 담고 바라보았다. 악착같이 끈덕지게 살아남은 생명력에 박수를 보내는 일 이전에 그 작은 것들이 한바탕 모진 바람과 싸웠을 결전이 애틋했다. 삶의 매 순간이 우린 얼마나 버거운가? 외롭고 아프고 고단하고 쓸쓸하고… 한 줄기 가을바람마저 허망해져서 나는 이렇게 도피하지 않았던가? 사방을 휘휘 둘러보아도 보이는 거라곤 산과 들과 감나무뿐이었다. 순간, 나는 뜬금없이 ‘백석’을 외고 있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춥고 외로우면서도 고고한 세계를 추구한 극한의 시인을 나는 이 가을에 만났다. 덕유산 자락의 어느 마을 감나무 아래서. 백석의 시어들이 따뜻한 손이 되어 내 등을 두드리는 듯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러니, 그러니 말이다. 삶은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있는 거라고. 고개를 들어 감나무를 쳐다보는데 나도 모르게 툭,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얼비친 사이로 높은 하늘이 나를 내려다본다. 괜찮다고. 빈손이어도, 바람에 나뒹구는 휴지 조각도, 소녀들의 핫팬츠도, 북카페의 수다도, 죄다 괜찮다고 한다. 하늘이 너무 높고 너무 푸르러서 눈동자가 시렸다. 아아! 그 하늘에 새털구름이 피어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눈꽃처럼 피어나서 이 가으내 쓸쓸한 빈손을 내밀라고 한다. 저 광활한 공간에 내 빈손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가을바람은 휑하니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넘치는 사랑과 슬픔이 있어 우리는 가을을 너끈히 앓아낼 수 있으리라. 길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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