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천 년같이 천 년을 하루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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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릇하게 빛을 잃어가는 앞산을 창 너머로 힐끔거리다가 그만 눈을 감아버린다. 12월이 코앞이다. 탁상용 달력을 보며 그저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간다. 연말을 맞는 달력 내용은 주 단위로 동그라미가 두세 개씩이다. 거기에는 후줄근한 일상이 개미떼처럼 줄지어 있다. 수시 2차 ○○모의면접, J 병원 송년사, ○○원고마감… 뿐인가? 커피 빈 PM3, 산 너머 남촌 12:30, 교육문화회관 늦어도 AM11… 동그라미 하나가 미심쩍은지 두 개짜리 일정표에 이르면 돌연 심란해지고 만다. 해야 할 일들과 만나야 할 사람들은 달력 속에서 잠잠한데 정작 나는 한숨부터 나온다. 커피집과 밥집이 대체 내 달력까지 침범하다니? 성치 않은 몸으로 순회하듯 찻집과 음식점을 들락거려야 할 연말이 아연해지는 건 지나친 외곬 근성일까? 나 한 사람쯤 유쾌 상쾌 죄다 불러 놓고 경합을 벌이는 젊은이들 틈바구니에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커피숍 한구석을 차지하지 않아도 될 테고, 더구나 미식가도 아니고 식도락도 없는 나 하나쯤 뷔페 접시를 들지 않아도 세상은 잘도 돌아갈 텐데 이 무슨 억지이고 낭비일까 싶은 것이다.
매년 오고 가는 연말인데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망년회를 마치 망령스레 치르는 지경을 누군들 피해 가겠는가? 그해의 괴로웠던 일들을 잊자는 취지와 제 나이를 망각하고 일희일비 경거망동하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 시끌벅적 사람 많은 장소는 애써 피하게 되고 혹시 다녀오더라도 한 사흘쯤 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리는 고약한 습성을 가진 나로서는 연말이 괴로울 수밖에. 게다가 12월, 적어도 한 해의 마지막 달이라는 키워드는 묵중하고 단연하기까지 해서 그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빼곡하게 적힌 일정표를 나 몰라라 하고 자주 먼 산을 내다보는 것도 따지고 보면 12월이라는 무게감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미래로 움직이는 비공간적인 연속체, 라고 오늘날의 물리학적 시간개념을 백과사전에서 옮겨온다고 해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하다. 시간에 대해 고찰한 철학자들의 서로 다른 철학적 해석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의 핏대를 세워도 결국은 도토리 키 재기이다. 시간의 흐름은 현실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고대인들이나 환영(幻影)이라는 관념으로 보는 인도 철학자들의 특정주의와 불교의 교리,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순환으로 보지 않고 직선적 관점에서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하는 견해를 그 다양성에서 재고할 뿐이다. 또한 뉴턴의 절대 시간과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지구의 자전을 바탕으로 하는 자전시, 천체의 운동방식에서 정의된 역학적 시간, 원자과정의 극도의 규칙성을 제기한 원자시 등등 시간과 현대물리학의 통합은 500~5만 년 범위 생물체의 나이를 구할 수 있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이라는 획기적인 과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규명되지 않는 시간개념 속에서 시간을 앓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야릇한 허무와 그럼에도 끝내 버릴 수 없는 초조한 희망이며 일말의 기대는 어쩌면 무한한 신이 유한한 인간에게 허락한 배려일까? 과학과 철학이 의기투합해도 시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는 숙명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탁상용 달력의 동그라미를 보면서. 일상은 시간 속에서 유영한다. 살아 있음의 화인, 아니 존재의 포착은 날이 가고 달이 가는 중에만 가능하다.
줄기차게 달려온 새털같이 숱한 날들을 두릿거리며 돌아본다. 무슨 미련 남아 그날들을 헤아리겠는가? 달력의 빼곡한 일정표가 정신을 산란하게 하고 창 너머 기운을 잃어가는 앞산마저 시큰둥해지면 경전을 펼쳐 든다. 손때 묻은 성경 어디쯤 12월의 공허와 무의미를 대변하고 위로해줄 구절이 있었던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마라.’ (벧후 3:8)
하루를 천 년같이 천 년을 하루같이… 심오하고도 온전한 시간개념에 숙연해진다. 투쟁도 두려움도 의혹도 없는 고요함과 평화가 밀려온다. 하루를 천 년같이 사는 것이라면 이성은 곧바로 ‘삶의 여유’라고 단정할 테고, 천 년을 하루같이 사는 것은 ‘삶의 긴장’ 정도로 진단할 것이다. 삶에서 긴장과 이완은 바퀴의 두 축처럼 바람직하기 때문에. 더하여 이런 정도의 해석을 넘어 메누하(쉼, 안식)의 시간개념으로 확장한다면 어떠할까? 종교적 해석이라고 고개를 외로 튼다면 더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비합리적 직관마저 의지하려고 했던 과정철학자들의 분투와 연말이면 수렁 속을 허우적거리듯 세월의 허상에 노출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에 대한 통찰은 불가피하다. 편하게 쉬듯, 고요하고 행복하고 조화롭고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거라고. 마치 영원을 사는 것처럼. 얽어매었던 일체를 풀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시간의 지향점에서 가능하리라.
12월이 고단하고 신산스럽게 일상을 짊어지고 온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남은 달이기를 바란다. 달력 속에 동그라미가 진을 쳐도, 창 밖 저 앞산이 누르스름하게 변해가도 마음 자락만은 청초했으면 좋겠다. 하루를 천 년이듯, 안달복달하거나 노심초사하지 않으련다. 누군가 커피집으로 불러내면 제꺼덕 책을 덮을 것이고, 또 다른 누가 ‘산 너머 남촌’이라는 도무지 생뚱맞은 밥집을 소개해도 당장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고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리라. 조급하게 속을 볶아가며 올해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어찌할꼬,라고 푸념을 일삼는다거나 인생살이 일장춘몽 따위 염세질환은 애당초 떨쳐버리련다. 하루를 천 년처럼 여긴다면 무에 그리 애를 태울 것인가. 또한 천 년을 하루처럼 여겨서 간난신고(艱難辛苦)에 첩첩산중이어도 평정을 잃지 않고 그날그날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리라. 기껍고 흔쾌하게. 천 년을 하루이듯 사는 것은 내 주위의 많은 사람을 사랑함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천 년이라는 천문학적인 시간도 하루처럼 짧을 것이니….
“얘? 네 울렁증 때문에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늦지 않게 와!”
수화기 건너편에서 친구는 벌써 나를 닦달한다. 핑계 따위 들어주지 않을 태세로 쐐기를 박는다. 그렇다. 망년회를 망령스럽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다. 우린 사랑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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