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의 성공? 실패? 삶은 단지 비틀대며 사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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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생활, 성공과 실패의 구분?
2011년 도가니 이후, 정부는 시설 내 직원들과 이용자들에 대해 1년에 8시간 인권교육을 의무화했다. 아무런 예산 책정도 되어 있지 않은 터라 정부 정책이라 말하기에도 어설프지만, ‘인권’이란 가치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시설에서도 강조되고 있다는 건 긍정적인 기류임에는 분명하다.
최근 이러한 연유로 해서 시설 내에 직접 찾아가 직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말로만 주장하고 강조되는 인권의 실체가 무엇인지, 거주인의 인권뿐 아니라 직원의 인권은 무엇인지, 인권의 가치가 우선시 되는 조직문화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등의 다양한 주제를 갖고 하루 4~5시간 몸으로 가슴으로 소통하다 보면 우린 어느새 ‘동지’가 되어 있었다.
교육이 끝날 즈음이면 직원들은 가슴으로부터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시간이었다며, 편견이나 거부감 없이 내용에 공감한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맨 나중에 정리하는 의미로 함께 보는 ‘지렁이의 꿈틀’이란 영화는 시설에서 일하고 있지만, 왜 ‘탈시설’도 ‘권리’인지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매우 좋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후 서로의 느낌을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이렇게 탈시설-자립생활 해서 성공한 사례 말고 실패한 사례도 말씀해 주세요.”
“…….”
자립의 실패와 성공? 스스로 원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가 말하는 자립이라면, 그건 그냥 삶 자체다. 성인이 되어 부모 품을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사는 건 장애가 있건 없건, 시설에서 살건 시설 밖에서 살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그저 우리는 시설에서의 생활이 아닌 것을 주장하고 강조하다 보니 ‘자립, 혹은 자립생활’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 뭐 그런 표현이 있을 수 있다. 과거 모 TV 프로그램에도 ‘성공시대’란 제목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성과를 낸 사람들이 주인공이 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프로도 자세히 보면 결코 ‘결론’이 아니었다. 삶은 ‘~ing’ 일뿐이고 그들도 모두 실수를 하고 잠시 방황도 하고 좌충우돌, 비틀거리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그 프로그램이 말하는 ‘성공’이란 딱 그 시기에 맞게 주인공의 인생을 되돌아본 셈이다.
탈시설-자립생활의 개념도 그런 것이 아닐까? 몇십 년 동안 시설이라는 분리된 공간에서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사회로 나오게 되면 다들 긴장하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배워나가야 하며, 인간관계라는 것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몰라 주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방황하고 힘겨워하며 다시 시설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삶의 모습이다. 인간은 누구나 방황하며 지향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탈시설-자립생활은 그래서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볼 문제가 아니라 그저 새로운 삶을 향해 열심히 때로는 좌충우돌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립생활 3년 차, 그러나 1년은 병원에서
서두가 길어진 이유가 있다. 이 글의 주인공 바로 이철수(가명, 남, 33) 씨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그는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다. 언어장애가 심해 반복적으로 물어보거나 오래 기다려야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서 그와 대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알아서 말을 길게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상대방이 힘들 거라 생각하는지, 아니면 이야기를 구성하기 어려운 것인지 영어처럼 주제어가 앞에 튀어나오는 아주 짧은 대화법을 구사한다. 또 그와 대화를 하려면 질문은 길게, 보다 구체적으로 해야 하고, 짧은 답변을 듣고 다시 재차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간혹 사람들은 뇌병변장애인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는 경우들이 있다. 상대방이 곤란해할까 봐 이기도 하고, 시간이 길어질까 봐 그냥 자기식대로 예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화의 목적은 정확한 의사소통이다. 속도에 구애받지 않고 그와 눈 맞추며 하는 대화는 보통사람들의 3~4배가 더 걸리는 듯싶다.
그는 몸의 경직도 심하다. 다리에 힘이 있어 가끔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겨 앉을 수 있고 수동휠체어를 타고도 혼자 천천히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실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외출할 때는 전동휠체어를 타야만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심한 장애를 갖고 있다.
이런 그에게 시설에서 나온 후 일상은 모험 혹은 전쟁 같은 나날들이었다. 초기에는 적극 모임에도 참여해서 ‘잘 적응 하는구나’ 생각했지만, 그는 외로움과 절망에 속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가 시설에서 나온 건 2010년 초반이니까 이제 만 3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실제 그가 동네에서 산 날은 2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10여 개월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다시 시설로? 아니다. 그는 지금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다.
결의·결단으로 시작한 자립생활
우선 그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아니다. 부모가 일을 하고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부양의무제 기준에 걸려 독립했어도 정부지원을 받지 못한다. 나이 서른이 넘은 성인이고 일반적 기준에서 노동능력이 부족해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함에도 여전히 노부모에 기대 살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하지만 그는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았다. 부모는 본인들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시설에서 나왔다”고 그를 천덕꾸러기 취급하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이럴수록 더더욱 부모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는지 그는 용돈을 달라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돈이 없다는 것’은 매우 화가 나는 일이었다. 수급권자가 되지 못해 주변의 활동가들이 마련한 개인 후원조직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해도 ‘왜 자기가 돈이 없는지’, ‘부모는 왜 나를 등한시하고 외면하는지’ 그로서는 아프고 슬픈 그 무엇이었다. 전화하면 퉁명스럽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고, 가끔은 울기도 하고. 언제나 되풀이되는 가족과의 갈등은 그에게는 넘지 못하는 산이며 가슴을 짓누르는 그 무엇이었다.
“85년도, 그러니까 5살에 시설에 입소할 때 ‘평생을 보호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백 단위가 넘는 돈을 수시로 시설에 주었대요. 그래서 면회도 거의 오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19살 때 처음 절 찾아오셨고 엄마는 27살 때, 그러니까 2006년도에 처음 면회를 오셨어요.”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멀리하고 찾지도 않았는지 그는 모른다. 그걸 물어보는 것보다 부모가 자기를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정말 행복했다.
“엄마가 돈 삼만 원을 주고 갔어요. 말도 몇 마디 못했는데, 그냥 가시더라고요. 그걸로 커피 사 먹고. 정말 좋았어요. 나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돈맛을 알아서 그 후로는 돈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 돈을 훔치기도 했어요. 미안해요. 정말.”
부모가 시설에 다녀간 이후 그는 더 용감해졌다. 원래도 좀 과격한 편이라지만 그 후 목소리가 더 높아진 것 같다고 한다. 부모가 있다는 든든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부모가 있는데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깊은 절망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기대만큼 뭔가 자기 생활이 바뀌지 않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시설에서 하도 난리를 치니까 집에 전화해서 저를 데리고 가라고 했어요.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서 오셨고, 2009년 6월 4일 드디어 집에 가게 됐어요.”
공교롭게도 그의 첫 번째 탈시설은 계획적이고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퇴출’이 그에게 자유와 가족을 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약 3개월간 집에 있으면서 가족과의 대화도 없었고, 그는 술과 담배에 의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급기야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부모는 그를 다시 다른 시설로 보내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몇 곳을 다녔다고 한다. 이 시설, 저 시설…. 산꼭대기에 있거나 계단뿐인 일반주택 2층에 있는 시설, 마당이 자갈밭인 시설…. 버티고, 울고, 발버둥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그 많은 시설에 입소하지 않게 되었지만, 마지막… 그는 저 멀리 전남의 한 치매노인요양시설로 가게 되었다. 처음 있던 시설보다 훨씬 감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인터넷을 통해 알던 활동가들에게 SOS를 해서 결국 2010년 4월 그곳을 벗어났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 ※함께걸음 자료사진 |
술에 빼앗긴 자유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찾았지만, 그는 처음으로 만끽한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신기했어요. 다 해보고 싶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싶었고. 그런데 돈도 없죠, 활동보조 시간도 적죠. 잘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게 힘들었어요.”
이런저런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생색내기만 하는 정부의 실속 없는 장애인정책에도 화가 났다. 신세 한탄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쌓였을 때, 사람들은 그 상황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때때로 찾는 것이 있다. 바로 술과 담배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괴로웠어요. 잊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안해요. 사람들에게.”
그는 매일 술을 마셨다. 돈이 없으면 빌리기도 하고, 때론 구걸해서라도 술을 마셨다. 술집 갈 돈이 없으니 집에서 마시고는 뒷정리를 하지 않아 방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세금 내라고 돈을 줬는데 그 돈도 다 써버렸어요.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어했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술이 깨어있을 때에는 “다시는 술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는 듯이 다시 술을 마셨다.
주변 활동가들은 이런 일이 반복되고 길어지자 최후의 수단으로 그에게 치료를 제안했다. 제안을 받은 그 또한 이제 더 물러설 수 없고 망가질 수 없다는 자기 판단을 한 모양이다. 그는 “네. 알겠어요. 갈게요”라며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어느 정도인지 다시 살펴보기 위해 퇴원했다. 규칙적인 식사와 상담, 교육을 받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 역시 자기를 실험해보고 싶었을 게다.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주변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뒤풀이 같은 거 할 때 술 마셔야 하는 자리인데도 저 때문에 모두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그는 사람들에게 고마웠고 보란 듯이 이겨내고 싶었다. 그 각오를 듣는 옆 사람들도 그를 믿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후 그는 다시 술에 입을 댔고 상황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다시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나 혼자는 안돼요. 혼자 있으면 자꾸 술 생각이 나요. 왜냐면 자꾸 화가 나거든요. 외롭고. 자립생활이 어려워요. 정말 어려워요. 인간관계도 내가 다 깼어요. 모든 게 다 내 탓이에요.”
그는 최근 체험홈 재심사를 받기 위해 잠시 병원에서 외출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 그는 언제나 깊이 반성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했다. 물론 그건 진심일 거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술에 쉽게 의존하긴 해도, 정말 잘 살고 싶은 마음,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정말 진심일 거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내 맘대로. 시설에는 절대 안 가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그는 “네, 그래야죠. 저는 활동가가 되고 싶어요. 정부가 정말 나쁜데, 나쁘다고 목소리 내고 화내고 싶어요. 병원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어요. 인터넷 언론을 자주 들여다보는데 빨리 나가서 저도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자유를 원하지만, 술에 자유를 빼앗긴 그. 술에 억압당한 그다.
▲ ※함께걸음 자료사진 |
지향하는 한 방황한다
그렇다면 그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병원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내요. 늘 사람들 생각만 해요. 야학 사람들, 전장연 사람들. 그리고 가족. 가끔 아버지에게 전화해요. 엄마는 한 번 면회 왔는데 제 얼굴은 보지도 않고 가셨어요. 왜 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커피만 들여보내 주고 갔어요. 기분 나빴어요. 속상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예전만큼 가족에게 기대하지 않으려고요.”
그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아나 보다. 부모 마음이 안 풀리는 게 속상하긴 해도.
“시간이 나면 부모님, 누나, 나 이렇게 네 사람이 한번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요. 속에 있는 말도 다. 물론 원망은 아직 남아있는데 제가 잘못한 것도 많으니까 죄송하다는 얘기도 꼭 하고 싶어요.”
그가 자립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일본 극단 오디션에 붙어서 함께 공연했던 게 제일 기뻤어요. 나도 뭔가가 된 것 같고 인정받는 것 같고. 그것밖에 떠오르는 게 없어요.”
사람들은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 스스로 존재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물망처럼 얽힌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인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품위 있게 살아갈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립이 결코 혼자 산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재확인할 때 비로소 ‘자립’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관계회복을 하고 싶단다. 비록 시설에서 나와 살았던 2년간 그다지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 같지만, 분명히 잘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비틀비틀, 삐걱삐걱하면서 그냥 그의 삶을 살고 싶은 거다.
어쩌면 사람 살이란 다 그런 게 아닐까? 삶이란 즐거움에 벅찬 나날들의 연속도 아닐뿐더러 지지고 볶고 싸우기도 하고 실수에 절망하기도 하고 의욕적으로 다시 희망을 기대하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 한번쯤 바닥을 치기도 하고, 운 좋게 승승장구할 때도 있듯이 말이다.
병원에 있는 동안 규칙적인 식사 덕분인지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깨끗하고 살도 올라있었다. 아주 보기 좋다고 하자, 그도 환히 웃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의 뒷모습이 씁쓸하고 쓸쓸하기 한이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싶다. 그의 인생인 것을. 다만 힘든 그 순간 옆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지켜봐 주고, 지지해주고, 이해해주면 달라지지 않을까?
모든 우리네 삶은 지향하는 한 방황하며 다채로운 한 편의 드라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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