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서 온 전화 > 대학생 기자단


북경에서 온 전화

[이서진의 살며 생각하며]

본문

J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거기… 언니로군요. 나, J예요. 기억하죠?”
“으응, 그래, 그럼, 기억하지.”

살갑지 못한 나는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하며 며칠 전 친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막무가내로 네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더라. 작업 방해하면 어떡하니? 시도 때도 없어. 미안하다.’ 난처해서 어쩔 줄 모를 때면 얼굴이 붉어지며 코를 찡긋거리던 친구의 오래된 습관이 생각났던 순간이기도 했다.

“오늘도 다른 사람들은 신나게 에어로빅을 하는데 나만 우울했어요. 퀼트를 배우러 갔을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골프를 해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 .”
무엇이 문제일까? 도무지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J의 전신에 우울질의 혈류가 구석구석 흘러 다니는 것을 내 어찌 알겠는가. 
“언니? 날 이해해줄 수 있죠? 언니라면 이해할 것 같았어요. 난 지금 이해받고 싶은 거예요. 누구에게라도.”
“… .”

뉘엿뉘엿 해 지는 시간에, 거반 30년 만에, 그것도 이 나라도 아닌 저 북경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이해받고 싶다는 J를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난감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럼 이해하고말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따위 그 많은 말들을 놔두고 나는 어스름이 내리는 창밖을 응시했다. 이해와 공감과 소통을 넘어선 막막한 무엇이 가녀린 J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휘장처럼 나를 덮었다. 살아가는 것은 그리도 쓸쓸하고 고요하고 막연한 것… .

어둠이 도심을 점령하면서 하나둘 네온등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도시를 감싸듯 펼쳐진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은 이미 식별하기 어려웠다. 23층 아래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들과 사람들은 차라리 장난감처럼 작았다. J는 쉬지 않았다.

“언니, 사람들이 날보고 복에 겨워 그런대요. 반듯하게 커준 아이들과 능력 있는 남편과 평생 써도 다 못쓸 돈과 남부럽지 않은 외모까지. 대체 뭐가 문제냐고. 난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죠. 그럴 땐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요.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나한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언니? 나도 이런 내가 정말 싫어요. 흐흑.”
J는 끝내 울고 말았다. 지금 내 앞에서 우는 것처럼 J의 울음소리는 생생했다. 창밖은 이젠 어둠이 완연했다.
“얘? 거기도 어두워졌니? 난 밖이 어두워지면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정리되더라. 그저 가만히 밖을 한번 내다봐.”
“… .”

간만에 나는 입을 열었다. 역시나 생겨먹은 대로 별 신통찮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J가 울음을 그치더니 반대로 입을 닫았다. 평정을 찾으려는 J가 휴우, 숨고르기를 하는 것까지 전화기는 포착했다. 통신기기는 왜 이리 성능이 좋은지. 물질문명의 풍요가 가져다준 대가는 참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J가 내다보는 북경의 어둠과 내가 응시하는 이 도시의 어둠은 같은 어둠일 것인가를 의심했다. J의 육체와 정신, 아니 영혼까지 침투한 그 우울질이 어둠 속으로 추락하길 바라면서. 

8년 전 J는 이 땅을 떠났다. 삶의 의욕은 더없이 왕성했고 야망 또한 남달라서 배우자와 의기투합해 중국에 회사를 설립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회사는 번창했다. 이제는 이름만 대면 웬만한 사람은 알 수 있는 정도의 회사가 되었고 이삼년 전부터는 일손을 놓고 삶의 여유를 누렸다. J의 자매인 친구는 간혹 J의 소식을 내게 전해왔다.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하여, 그동안 일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고 즐기며 잘 살고 있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여학교 때 후배이기도 했던 J의 교복 입은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단정한 단발머리와 플레어스커트. 유독 이마가 희고 눈동자가 컸던, 단발머리에 꽂은 핀조차 눈에 선연했다. ‘그래, J가 잘 살고 있다니 좋구나. 우리 몫까지 몇 곱으로 누리라 해라.’ 친구와 나는 가끔 만날 때마다 시시덕거렸다.

‘걔가 어려서부터 시샘이 많았잖니?’ ‘그래그래. 고 새침데기가 말이야.’ 신명나는 추억담은 커피가 식는 줄도 몰랐다.

일 년 전부터 친구는 동생의 우울증에 대하여 그야말로 우울하게 소식을 전해왔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이라니? 남모르는 아픔이 있었을까? 그래도 그렇지, 지가 뭐가 부족해서… .’ 친구는 연민과 궁금증과 탄식의 경로를 매번 거듭했다. 신경학적 문제라든지, 우울증에 취약한 유전자며,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 따위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주워섬길 수도 없었고 마흔 중반이니 시기가 시기인지라 ‘빈둥지 증후군’을 거론하며 나불댈 수도 없었다. ‘왜 아니겠니? 그 낯선 땅에서… 누군들 외롭고 고통스럽지 않던? 생의 가시들이 때때로 J를 할퀴고 갔겠지. 그 상처들이 아우성을 치는 건지도 몰라.’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J의 우울증 때문에 덩달아 우울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J의 음성은 고스란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비단 J만의 문제일까?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의 굴레를 벗어날 자 누구이랴. 세상이 온통 거대한 문제덩어리이니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내야 하는 숙명이므로 너나없이 문제를 안고 사는 건 당연하리라. 다만 그 문제의 경중과 양상이 저마다 다르게 나타날 뿐이지 않겠는가.

J가 끝내 울어버렸던 것과는 달리 나는 J가 구하는 대답을 끝내 해주지 못했다. 그래, J 너를 충분히 이해해, 라고. 왜, 나는 못했을까? 설령 허튼소리가 될지언정. 융통성 없는 방식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악습은 나 또한 문제를 시한폭탄처럼 안고 살고 있고 누구에게든 이해받고 싶은 욕구가 내 속에 은밀하게 숨겨졌기 때문이었을까. J 네 아픔을 다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그 아픔을 언제든지 들어줄게, 라는 속엣말마저 나는 하지 못했다. 바보천치처럼.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도시의 밤은 어둠에서 물러나 있었다. 곳곳의 네온사인은 어둠을 갈라서 이리저리 떼어놓는 일꾼처럼 번쩍였다. J가 사는 북경의 밤도 마찬가지일까. 나는 전화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벨이 울린다면 그땐 못다 한 말을 냉큼 하리라. ‘J 너무 아파하지 마. 북경의 밤하늘이 설마 칠흑은 아니겠지.’  

 

작성자소설가 이서진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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