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시달리다 ‘시설’에서 도망친 영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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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어느 날, 20살의 영수(가명)란 친구를 만났습니다. 영수 씨는 지적장애 3급이라 표시된 장애인복지카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후 아버지, 남동생과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일반 고등학교 일반학급에서 공부했지만, 왕따와 부적응으로 2학년 때 중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장애가 있다’ 생각하지 않았고, 아버지조차도 그냥 좀처럼 말 잘 안 듣는 고집불통 아들로만 생각했지 지적장애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입대 영장이 나올 즈음 신체검사에서 장애인등록에 대한 의견이 나와 병원에 갔더니 지적장애 3급을 판정해 주더랍니다. 그렇게 해서 영수 씨는 지적장애 3급이란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본인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가끔 저에게 “누나, 제가 장애인이에요? 사람들이 저보고 장애인이라고 해요. 난 아닌 것 같은데…기분 나쁘게…”라고 말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하는지 참 난감합니다. 적절한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해 ‘장애등급제’를 만들었지만, 서비스 만족과 보호는커녕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이런 경계급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IQ로 구분 짓는 방식에서 기준선을 넘느냐 아니냐에 따라 ‘장애’ ‘비장애’란 이름을 덧씌우게 되는데, 장애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과 인식을 그들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영수 씨는
‘장애’ 때문에 집이 아니라 ‘시설’로 가게 되었으니까요.
영수 씨가 시설에서 생활한 것은 1년 남짓한 시간이었습니다. 학교를 중퇴했으니 하는 일이란 그저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게임방에 가는 게 일과였습니다. 친구가 없으니 동네 어린 꼬마들이나 또래의 학교에 가지 않는 친구들이랑 어울리기 일쑤였죠. 하지만 그 관계는 우정에 기반을 둔 친구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영수 씨의 특성을 금세 알아챈 동네 친구들은 영수 씨를 이용했습니다. 용돈이 부족한 이 친구들은 영수 씨에게 자전거를 훔쳐오게 했고, 그것이 들통 나자 영수 씨만 남겨둔 채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절도행위로 붙잡혀 보호처분을 받게 된 영수 씨를 이대로 계속 둘 수 없었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고 세심하게 신경 써 줄 사람이 없는 이상 이런 일은 반복될 것이고, 아들을 범죄자로 만들기보다 ‘시설’이란 곳에 보내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라 생각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영수 씨는 아버지 먼 친척의 제안으로 익산의 ‘사랑원’이란 장애인 시설로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영수 씨를 만나게 된 이유를 설명해 드리지 않았네요.
2010년 10월 어느 날, 영수 씨 아버지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우리 아이가 시설에 있었는데, 그곳 선생들에게 폭행을 당해서 밤에 도망쳐 나왔어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늦은 저녁 시간 다급한 전화였기에 바로 다음 날 오전에 바로 만났습니다. 폭행사건은 피해 사실에 대한 증거확보가 중요하고 사건 경위가 잊히기 전에 본인 진술서 등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시간을 늦출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영수 씨는 저를 만나기 바로 이틀 전 시설에서 ‘탈출’했습니다. 말을 잘 듣지 않고 담배를 피워놓고 거짓말한다는 이유 등으로 직원에게 각목으로 맞다가 너무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냥 도망쳤습니다. 11월의 저녁 8시는 이미 해가 진 상태로 주변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특히 외진 시골이라 다니는 사람마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 이름을 부르며 찾는 소리를 듣고는 빈집에 들어가 그 소리가 사리질 때까지 숨죽여 있다가 마을에 들어선 시내버스를 타고 무조건 익산시로 나갔다고 합니다.
밤이슬을 피해 들어간 피시방에서 하루를 보냈고, 이튿날 터미널에서 서성였더니 맘 좋은 버스 기사가 그냥 타라고 해서 고향인 서울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한글도 알고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 진술내용과 자술서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충격적인 사실은 폭행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보다 장애가 심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 말을 잘 듣지 않았다는 이유, 담배를 피워놓고 거짓말했다는 이유 등으로 파리채로 때리거나 각목으로 때리거나 발바닥을 때리거나, 밥을 굶기고 식당 앞에서 손을 들고 서 있게 하는 등 폭력과 굶김, 정서적 학대를 1년 동안 지속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마당에 땅을 파게 하고 들어가게 한 후 흙으로 몸을 덮는 등 영화에서나 봄 직한 무서운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날짜와 직원 이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영수 씨의 진술은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각목으로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 멍이 든 몸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 증거를 확보하고, 곧장 진단서를 끊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작성했고 일주일 후 관련 자료를 제출하자 또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인권위는 조사관을 파견해 다시 피해자 진술을 정리했습니다. 무려 4시간 동안 진행된 피해자 진술조사에서 영수 씨는 저에게 이야기한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진술했습니다.
이틀 후 인권위는 2명의 조사관을 ‘사랑원’에 파견해 가해자와 시설 측 책임자를 조사했고, 거주인 면담을 진행했습니다. 인권위 현장 조사는 12일이 지난 후 진정인인 저와 아버지, 영수 씨가 함께 대동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헌데, 참 가관이었습니다. 시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설의 원장, 사무국장, 가해 직원 등은 인권위 직원에게만 달라붙어 인사하고 말을 건네고 있었습니다. 정작 피해자이고 함께 1년을 살았던 영수 씨와 그 아버지에게는 인사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투명인간이 된 것이지요. 시설을 운영하는 그들에겐 의미 없고 존재감 없는 한낱 시설 거주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시설 측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인권위 조사관에게는 굽실굽실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작 피해자에게는 사과는커녕 인사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도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는 듯했습니다. 거주인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이 굳어진 듯했습니다.
참고인 자격으로 동행했지만,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원장과 원장 어머니(사랑원은 미신고시설로 출발해 2008년 법인이 되었고 당시만 해도 어머니가 원장이었음. 딸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 법인 원장이 되었고, 아들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음)에게 어떻게 피해자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냐고, 말을 안 들어 몇 대 때렸다는 걸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는 거냐고, 저는 흥분해 토해 냈습니다.
인권위 조사관 역시, 상황이 심각해 각오해야 할 거라고 하자, 그제야 갑자기 울며불며 영수 씨를 잡고 미안하다고, 아버지를 붙잡고 용서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진정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울음에 대꾸도 하지 않고 나와 버렸습니다.
보고서가 작성된 후 인권위 차별소위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드디어 2011년 3월 28일 인권위 결정문이 나왔습니다.
다른 거주인 조사결과 폭행이 단순히 영수 씨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직원들의 폭행 사실을 시설 측이 미리 알고 있었고, 그걸 시설이 당연히 여기고 있었으며, 재발방지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자 형사고발을 하고, 관할 지자체에 시설폐쇄와 법인 허가 취소를 권고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결정문이 나온 즉시 논평을 내고 관할 지자체인 전라북도와 익산시에 공개질의서를 보내 앞으로 어떻게 조치할 예정이냐고 했지만, 그들은 “형사 처분의 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뜻만 표명할 뿐이었습니다. 가해자 처벌은 경·검찰의 역할이기에 추후 지켜볼 수 있다 해도 시설폐쇄와 법인 허가 취소 건은 그것과 상관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법인시설이 폐쇄되거나 법인 허가가 취소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니 얼마 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도가니’의 실제 사건인 인화원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폐쇄와 법인이 취소된 경우입니다.
그동안 인권위에서는 비리와 폭행 등 인권침해 사건이 불거졌던 시설 등에 대해 이러한 권고 조치를 내렸지만, 이를 수행한 지자체는 그 어느 곳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지자체는 “뭐 그런 일로 폐쇄하고 취소까지 합니까? 반성하고 잘하면 되지요”라고 말하지만, 폭력에 대한 안일한 접근은 쉽게 바뀌는 부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거주인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화이며 운영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인권위 조사관들도 자괴감을 갖는 것 중의 하나가 ‘권고’밖에 할 수 없어서 지자체가 거부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지자체의 의지와 감수성이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얽히고설킨 시설과 공무원들과의 관계에서는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그 무엇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입니다. 경찰 조사 후 검찰로 송치돼 가해자들의 형사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인권위 결정 후 1년이 다 지나가는 시점인데도 또다시 형사소송으로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자체는 검찰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태도를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두고 볼 일입니다.
거주인 인권과 시설 민주화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 없이 귀찮은 일로만 치부해 버리는 지자체가 어떻게 나설지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영수 씨의 삶이 아닐까요? 다행인 것은 아버지는 이제 영수 씨를 ‘시설’이란 곳에는 절대 보내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아들에게 미안하고 이젠 영수 씨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천만다행인 생각이죠. 그러나…사회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습니다.
시설에 들어가기 전의 삶과 그다지 달라진 것 없이 예전의 삶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설에서 도망쳐 나온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2번이나 중학생 아이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병원 신세를 지고 수술까지 해야 했습니다.
현재는 택배 물류센터에서 주말에 번 돈으로 일주일을 살고 집에도 멋대로 들어오고 나간다고 합니다. 스마트 폰도 벌써 두 번이나 샀고 요금은 엄청나게 나온다고 합니다. 아버지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일쑤고, 저와 활동가들의 이야기에도 ‘네, 네’ 대답은 곧잘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지속해서 옆에서 경제개념과 사회활동에 대해 적응을 할 때까지 함께 해 줘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지적장애인이 온전히 살아가는 데는 여전히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겨지기 때문입니다.
강화도에 있는 직업재활시설을 추천하고 함께 상담도 받으러 갔지만, 다시 ‘시설’같이 자유가 없는 곳은 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가장 나은 방법을 찾지만 달리 방도를 찾을 수 없는 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시설 생활이 아니라면, 영수 씨 같은 사람은 사회의 천덕꾸러기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피해자로, 혹은 누군가의 가해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요?
영수 씨는 지난 1년 동안 왜 자신이 시설에 있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답답해하고 그곳의 거주인들과도 잘 섞이지 못했습니다. 자유롭게 나가서 돈도 벌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기술도 배우고…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사는 꿈을 키워왔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영수 씨가 원하는 삶…하지만 씁쓸하고 속상하게도, 한국 사회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그것 하나 보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대체 해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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