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서의 ‘돈’과 자립생활에서의 ‘돈’이란 > 대학생 기자단


시설에서의 ‘돈’과 자립생활에서의 ‘돈’이란

[여준민의 탈시설 이야기]

본문

  이번 글은 제가 아는 한 분의 실제 목소리입니다. 장애인생활시설에서 22년을 살고 올해 결혼을 해 알콩달콩 사는 온화하고 씩씩한 분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통해 시설생활에서 ‘돈’이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생히 들려 드릴까 합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월 2~4만 원씩 나오는 장애수당도 관리를 못 한다는 이유로 재활교사가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돈 한 푼 받아본 적 없었다고 합니다. 또 시설장들은 “우리 시설은 돈이 필요 없어요. 모든 걸 다 해주는 걸요”라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쓰임과 위력이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지요. 아무리 시설에서 생활한다 해도 개인의 소비 욕구란 있는 법, 모자라면 모자랐지 돈이 필요 없다거나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시설 측이 맘대로 사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립이란 돈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돈’이란 것을 통해 시설이 사람들에게 어떤 곳인지 함께 공유할 수 있길 바랍니다.

-글쓴이 드림

 

   
▲ 김동림 씨

  안녕하세요. 저는 김포시의 한 법인시설에서 22년을 살았던 김동림입니다.

  1973년 부산에서 살다가 성남으로 이사와 당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습니다. 1987년 당시 25살이었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김포의 ○○시설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2009년에 처음 자립생활을 시작했으니까 22년을 시설에서 산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라고 하는 20~40대를 저는 시설이라는 곳에 갇혀 살았던 것입니다.

  2009년에 시설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설이 후원금을 착복하고 거주인들에게 제대로 된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은 상황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렸는데, 더는 거기서 살고 싶지도 않았고, 죽더라도 밖에 나가서 살다가 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 시설이 땅값이 올라가자 더 외진 곳으로 시설을 이전하려고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점점 사회에서 멀어지는 거고, 대중교통도 쇼핑 상가도 주변에 마을도 없는 곳에 가면 정말 완전히 갇혀 지내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살 수는 없었죠. 그동안도 참고 살았는데, 이번에 시설이 이전되면 완전히 고립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많았습니다.

  그 시설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형시설이었지만, 일가족이 이사회 등을 장악해 대표적인 족벌체제라고 비판받았던 시설이었죠.

  후원물품이 들어와도 우리에게는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창고에 넣더니 유통기한이 지난 다음에야 과자를 주기도 했었지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5시에 저녁을 먹고 6시 정도면 잠을 자야 했는데 잠이 오나요? 안 오지요. 시간이 좀 지나면 배가 고픈 거예요. 이상하게 밥을 많이 먹어도 한 번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들어본 적이 없어요. 국 하나에 김치 3 쪼가리, 마늘쪽 4개, 검은콩 몇 알이 반찬 전부였는데, 이상하게 또 미역국에 닭을 넣었더라고요. 소고기를 넣는 건 봤어도 닭을 넣는 건 처음 봤어요. 반찬은 거의 날마다 똑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못 참겠더라고요. 몇 사람끼리 모의를 해서 창고로 몰래 들어갔죠. 근데 정말 많은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팔뚝만 한 쥐가 날아다니는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초코파이 몇 상자만 얼른 들고 나왔죠. 그다음부터는 창고도 무서워서 못 가겠더라고요.

  한번은 식당 아주머니가 조용히 저녁에 내려오라고 하는 거예요. 7시인가 8시에 혼자 갔더니, 신문지에 둘둘 싼 뭔가를 주시더라고요. 누룽지였어요. 아주 많은 양이었는데, 같이 먹으라고……. 얼마나 고맙던지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더구나 옷 입는 것은 꼭 죄수복과 거의 같았어요. 모두 빡빡머리에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죠. 남, 여 모두 똑같았어요.

  그때는 아무튼 저녁에 일찍 자니까 사람들이 5시면 다 일어났어요. 씻고 하는 일이 뭐냐면 빨래였어요. 일단 다들 시설에 입소할 때는 자기 옷도 몇 벌 가져오고 했으니까 개인 소유의 옷이 몇 벌 있었지요. 시설에서는 똑같은 색깔의 운동복을 주고 입으라고 했지만, 자기만의 옷을 입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근데 공동세탁을 하니까 그냥 세탁실로 보내면 되는데, 자기가 빨래를 해요. 왜냐면, 빨래통에 들어가면 또 섞이게 되고 주인한테 안 주고 돌려 입기를 하는 거예요. 내 옷 달라고 해도 모른다고 하고. 그러니까 악착같이 힘든 몸을 하고도 자기가 빨래를 했지요.

  외출은 꿈도 못 꿨어요. 수동휠체어를 타니까 자원봉사자가 와야지만 나갈 수 있었어요. 직원들과 외출을 같이 한 적은 거의 없어요. 가볍게 주변 산책이나 인근의 슈퍼마켓 같은 곳을 갔지요. 근데 돈이 없으니까 간단한 과자부스러기 같은 것들만 사 먹을 수 있었지요. 그것도 몇 번.

   
▲ 김동림 씨
  처음 시설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주신 1만 원이 내가 갖고 있던 돈 전부였어요. 제가 시설에 들어간 다음 날 원장이 그러더군요. “여기는 돈이 전혀 필요 없는 곳이다”라고요. 그래서 전 ‘아, 여기는 모든 걸 다 해주는 굉장히 좋은 곳이구나’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기대와 환상은 원장이 그 말 한 다음 바로 즉시 완전히 깨져버렸어요.

  시설에 들어간 날은 저녁에 도착했고 어리둥절해서 주변의 상황이 눈에 안 들어왔거든요. 근데 아침에 시설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다들 맥없이 앉아만 있고 빡빡머리에 낡은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으니, 정말 감옥의 죄수랑 똑같아 보였어요.

  원장의 말대로 돈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어도 쓸 수 없었던 겁니다. 왜 돈이 필요 없겠어요. 시설에서 원하는 만큼 다 해주는 게 아니니까 필요한 걸 사고 싶었지요. 그런데 나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어쩌면 원장 말이 맞는지도 몰라요. 나갈 수 없으니 돈이 필요 없는 거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돈 쓰는 걸 아주 잊어버렸어요. 나갈 수도 없으니까 그냥 자포자기해 버리는 거죠. 아무런 기대나 희망도 품을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시설에 들어간 지 딱 19년 만에 저에게 돈이라는 것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2006년인가?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는데(지금 같이 시설에서 나온 한규선과 함께) 장애수당이 1만 원 올라서 7만 원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때 “어? 장애수당? 그러면 그거 우리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규선이와 주고받았지요. 그랬더니 그 말을 옆에서 듣던 방 담당 재활교사가 “꿈도 꾸지 마세요” 하는 거예요. 속으로는 “에이 씨~”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었죠. 말해봤자 기분만 상할 거니까.
실은 그전에도 장애수당이란 게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근데 시설에서 주지 않으니까 ‘우리는 해당 사항이 없는가 보다’ 했지요.

  그런데 아마 2006년 10월쯤인가? 나갔던 규선이가 들어오자마자 날 보더니 다짜고짜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그냥 가만히 두고 보면 알 거라고만 하더라고요.

  그런데 다음 날 사무실에서 불러 내려갔더니, 대뜸 내 이름으로 된 50만 원이 든 통장을 주는 겁니다. 아무 설명도 안 해주고 “그냥 가지고 가”라고만 하는 거예요.

  월 10만 원씩 찍혀 있었고 5번 입금되었으니까 50만 원이었는데, 설명은 안 해줬지만 그때 ‘아, 이게 장애수당이구나’ 하는 걸 알았죠.

  정말 좋았어요. 그전에는 사고 싶은 것도 많았고, 먹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는데, 이상하게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내 돈이 있다는 걸 생각하니까 안 먹고 안 사도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때부터 ‘자립’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10만 원 중 5만 원은 정기적금을 들고, 5만 원으로 용돈을 쓰다가 남으면 또 저축했어요. 일단 큰 목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게는 처음으로 생긴 돈이니까 아끼고 싶고 모아서 나가고 싶었던 거죠. ‘자립’이 가능할 거란 생각은 못해봤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나가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막연히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설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저를 보고는 “아껴서 뭐 하느냐, 좀 써라, 써”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돈을 쓰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별로 안 들었어요. 저축도 의미가 있었거든요.

  돈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래서 2009년 시설에서 나올 때 제 이름으로 된 ‘200만 원’ 짜리 적금 통장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죠. 그거라도 얼마나 흐뭇하고 뿌듯하던지…….

  피복비는 분기별로 따로 나왔는데, 개인통장이 아니라 법인으로 한꺼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여름옷은 싸지만, 겨울옷은 비싸니까 좀 모아뒀다가 직접 사러 나가기도 했어요. 그때는 장애수당이라는 게 이제 개인한테 줘야 하는 거고 다들 수중에 돈이 생기니까 나갈 수만 있으면 나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외출이 쉽지 않으니까 초기에는 직원에게 부탁해서 옷을 샀지요. 맘에 들지 않아도 개인 옷이라는 게 좋아서 그냥 입었어요.

  나중에는 직원에게 부탁해서 생전 처음 내 옷을 사러 밖에 나갔어요. 처음 산 그 옷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아주 낡아서 입지는 않지만, 마음에 들기도 하고 처음 산 옷이라는 것이 애착이 가서 버릴 수는 없더라고요. 겨울 잠바 하나와 벨트를 맬 수 없어 색깔 있는 고무줄 운동복 바지를 하나 샀는데, 모두 7만 원이었습니다. 내 맘에 드는 옷을 처음 사본 거예요. 19년 만에 처음…….

  시설에서는 똑같은 옷만 입으니까 지나가다가 좋은 옷만 보면, ‘아, 좋다. 입고 싶다’ 그런 욕망이 컸습니다. 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더 간절히 바라고 욕심을 내는 거지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왜냐고요? 지금은 아내도 있고(신혼 1개월도 안 됐거든요) 아껴야 한다는 걸 알기도 하지만 그렇게 욕구가 많이 생기지 않아요. 요즘은 시간도 많으니까 자유롭게 다니면서 일단 눈으로 쇼핑하고 가격비교도 하고, 그래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들고 싼 것을 선택할 수가 있지요.

   
 
  전에 시설에서 살 때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쇼핑을 한다고 해도 애만 탔거든요. 게다가 시설에서 밥 먹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을 넘기면 밥을 안 주니까 5시까지는 꼭 들어가야 했지요. 그게 외출을 해도 굉장한 스트레스였습니다.

  제가 집에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교회에 다닌 적이 있어요. 청년부에 소속되어 활동도 했었는데, 그때 관계를 맺었던 청년들이 1989년인가? 후원금 5만 원을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눈물 나게 좋았는지. 그야말로 기분이 삼삼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청년들이 중고 흑백 티브이를 10대 사서 기증하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방마다 티브이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마저도 사람들이 좋아했었지요. 필요한 뭔가를 살 수는 없었지만, 물품이라도 후원을 받으니 좋더라고요.

  그러다가 이런 식의 후원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미쳤습니다. 그래서 저와 현수 등 몇 사람이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교사들에게 제안했지요. 어떤 거냐면, 동아리 형식의 반을 좀 만들자고 했어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컴퓨터와 보치아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제안을 하고 교사들이 제안서를 써서 어딘가에 제출했어요. 그러고 나니, 와~ 진짜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3000만 원의 후원을 받게 된 거에요. 그 돈으로 컴퓨터와 컴퓨터 책상을 샀죠. 컴퓨터를 배우고 익히면서 사람들이 달라지는 걸 발견했어요.

  그리고 또 보치아 세트가 하나에 30만 원 정도 하는데, 이것도 제안서를 교사들이 써서 냈더니 또 500만 원이 지원되는 거예요. 신기했죠. 그래서 음악방송반도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활동했습니다. 그때 저는 지금보다도 언어장애가 심했습니다. 지금처럼 말을 이어갈 수 있는 건 당시 디제이(DJ)를 해야 하니까 연필 물고 연습을 많이 했죠. 참 잘한 거 같아요, 하하.

  저는 이런 활동을 통해서 돈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던 것 같아요. 한 마디로 돈을 알게 된 거죠.

  물론 제 개인 돈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돈으로 어떤 것을 사고 뭔가를 하면서 변화되는 사람들을 지켜봤거든요. 그때는 ‘할 수 있다’라는 것 자체의 기쁨이 컸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더라도 뭔가 할 수 있겠구나’ 그런 막연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죠.

  그러다가 ‘자립’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2009년부터였습니다. 당시 제가 있던 그 시설은 김포 개발이 되면서 땅값이 오르니까 거기를 팔고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이렇게 자꾸 마을과 멀어지고 격리되면 더욱더 고립될 것 같아 반대했습니다. 그때 법인에 대해 책임이 있는 양천구청에 가서 항의하는 싸움을 했는데, 그때 만난 장애인단체 비장애 활동가들, 그리고 지역에서 사는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충격과 동시에 희망을 품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장애가 심한 사람들인데, 지역에서 자립해서 살거나 전동휠체어를 타고 마음대로 다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거지요.

  저는 ‘자립’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모아둔 돈도 별로 없는 상황이었지만, 활동보조제도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 부딪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지만 200만 원이란 돈이 저에게 있고, 장애연금이 매월 나올 거고, 수급권자가 되어 수급비를 받으면 얼추 굶지는 않고 살겠더라고요. 자립에 대한 계획과 희망에 찰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되는 저의 전 재산 200만 원! 그것은 저의 밑천이자 든든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만일 그 돈이 없었더라면 불안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일 2006년이 아니라 훨씬 그전부터, 23년 전, 시설에 들어갔던 1987년부터 저에게 이런 돈이 직접 줬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자립에 대한 계획을 좀 더 일찍, 그리고 구체적으로 세워서, 제가 20~40대 청춘을 거기서 썩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왜 시설에만 지원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 그 당사자에게는 돈 한 푼 안 주는 걸까요? 시설은 가족들이 장애 때문에 힘겨워서, 경제적으로 곤란해서 어쩔 수 없이 보내는 곳입니다. 그 어떤 가족이 넉넉한 용돈을 줄 수 있겠습니까?

  시설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주어지는 돈이 있다면, 저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기 위한 계획을 하나하나 세울 수 있습니다.

  아무런 기대와 희망 없이 사는 건 사는 게 아닙니다.

  자금부터라도 시설에 사는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줘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고 저축도 하면서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 있게 살고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것은 어쩌면 시설에 있을 때부터 경제적인 개념에 눈뜨고 관리하면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시설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돈을 갖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과 계획을 스스로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작성자여준민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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