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토막 인생, 인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주인이 되다 > 대학생 기자단


반 토막 인생, 인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주인이 되다

[박한용의 노숙인과 인문학의 만남]

본문

  노숙인과 인문학, 그리고 성 프란시스 대학에 대해 얘기하려면 교수진보다는 그곳을 ‘학생’으로 거쳐 간 분들의 얘기를 직접 듣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노숙인의 삶을 슬쩍 엿본 사람이 노숙인에 대해 얘기하기란 한계가 있고 때로는 기만적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문학은 ‘자신의 일은 자신의 입으로 말하라’는 원칙에 충실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성 프란시스 대학 졸업생들이 월간지에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함께걸음은 이른바 소외계층, 사회적 약자의 삶을 얘기하고 대안과 극복의 미래를 열어가자는 취지를 갖고 있기에, 그분들이 스스로 체험하고 느낀 점을 직접 말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노숙인은 한마디로 시민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복지’라는 미명 아래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한 급식과 숙박시설을 제공받음으로써 끊임없이 사회와 격벽을 치고 ‘사육당하는 존재’이다. 누구도 이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서울역 앞을 지나는 이들은 광장을 유령같이 헤매는 이들에 대해 고개를 돌리거나 혀를 차며 오로지 불편한 광경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이제는 그들이 말하고 싶어 한다. 말하고 싶은 과정이야말로 그분들이 스스로 두발로 서려는 과정이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아닌가는 독자의 몫이다.

  이번 글의 필자인 권일혁 선생은 성 프란시스 대학 인문학과정 4기(2008년) 졸업생이다. 우리 학교와 인연을 맺기 전 권 선생님의 삶은 막노동, 껌과 볼펜 팔기, 술과 노숙으로 점철되었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수전증으로 시달리면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 학교에 들어오면서 “머슴이 아니라 주인이 되기 위해 배운다”는 각오로 2008년 한 해를 열심히 다녔다.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지만, 그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극빈층의 사이클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성 프란시스 대학의 인문학은 성공했는가’, ‘그는 새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금기이다. 인생에 성공과 실패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문제는 자기의 삶을 찾으려는 고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함께 관계하고 서로 치유하려는가 하는 ‘관계’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이 글은 얘기하고 있다.

  

인문학을 배우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다
글 권일혁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4기 졸업생


반 토막 징크스를 깨뜨리기 위해

  나의 자랑스러운 모교, 노숙인의 희망의 인문학 ‘성 프란시스 대학’을 수료한지 벌써 3년차가 되었다. 모교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흠모하는 마음이 더 짙어져 간다. 짙어지는 마음만큼 나는 습관처럼 ’성 프란시스 인문학은 나에게 무엇인가‘ 질문한다. 인문학이 대체 나에게 무엇이기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밤잠을 뒤척이게 하는가. 2008년부터 전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인문학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내면 여행을 시작했고, 지금도 이 우문에 대한 현답을 찾아 학우들과 교류하며 소통하고 있다. 이렇듯 쉼 없이 나의 내면을 더듬어가며 탐색 중이다.

  98년 IMF, "아이 엠 아파" 때부터 노숙생활을 시작한 나는 막노동 몇 차례 해서 받은 돈을 술에 쏟아 부으며 세월을 탕진했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때려치우고 껌과 볼펜 등을 파는 ‘팔이의 삶’으로 연명하게 됐고, 결국은 절망과 좌절, 희망의 늪 속을 허우적거리는 진정 바닥 중 바닥 생활까지 하게 됐다.

  그렇게 나는 산발의 머리를 1년에 한 번 정도 자르고 세수는 석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조선간장 썩는 듯한 향수로 버무려진 서울역 대표 노숙인, 동료들마저도 징그럽다며 회피하는 왕따 노숙인이 되어 버렸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나 자신조차 징그러워 소름이 끼칠 정도였던 ‘상판대기’를 탈피해 성 프란시스 4기를 수료하기까지, 동기부여와 변화의 다리 역할을 한 성 프란시스 대학은 절묘한 타이밍에 만나게 된 천생연분이었고, 내 생애에 가장 특별하고 탁월한 선택이었다.

  입학 전후를 상기해 보면, 내 삶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엔 정말 만신창이였다. 짐승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반은 잘 나가는데 마무리가 안 되는 삶을 살아왔다. 나를 너무나 닮은 주위 노숙인 동료들 역시도 ‘학교는 중퇴, 결혼은 이혼, 직장은 퇴출’ 이렇듯 모두 반 토막 인생을 살아왔다. 한마디로 반 토막 인생 군상들의 종합전시관 같았다.

  그런 내가 입학 면접을 통과하다니, 엄청 기뻤다. 내 인생에 있어 단번만의 합격은 이것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반 토막 징크스를 깨뜨려,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완전하고 깔끔하게 완성된 결실을 창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성 프란시스 대학 입학에 대한 내 나름의 각오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성 프란시스 대학의 사각모를 기필코 쟁취한다! 포기는 절대 없다! 황금의 궁전과 속옷을 벗은 클레오파트라가 내 앞에 나타나더라도 반드시 학교는 간다! 학우들과의 화목을 위해 내 스스로가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술을 만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였다. 나는 내 인생 최후의 도전이며, 더 이상은 없다는 결사의 각오로 일 년의 여정을 시작했다.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 배우다

  성 프란시스 인문학은 확실히 일반 대학의 인문학과는 다르다. 같은 교재로, 대학의 강의 방식 그대로 수업을 하지만 그 목표가 다르고 결과가 다르다. 빨래줄·전깃줄에 목 매기, 쥐약·농약 마시기와 절통(切痛,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함)의 유서 2장 정도는 기본으로 써 본 저력과 더불어 염라대왕 무르팍 앞까지 다녀온 체험에서 비롯된 내공이 있어서일까? 우리는 머슴이 되기 위해 배우는 학생들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찾아 주인이 되기 위해 배웠다.

  재학 기간 중 강의를 맡은 분들을 우리는 통상적 호칭인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졸업 후 몇몇 동기들은 스스럼없이 ‘스승님’이란 엄숙한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지식의 전달자란 의미가 강한 반면, 스승은 깨우침을 도와주는 준엄한 역할자란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을 스승님으로 격상시킴으로서 동기들은 스스로 “나는 깨우친 자이다”란 자부심을 갖게 됐다. 우리는 성 프란시스 대학을 통해 ‘지식을 배웠다’고 하기보다는 이전까지의 저질 의식을 깨고 새로운 의식으로 인격적 전향을 할 수 있는 동기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학생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우리들에게 더 크게 배운다고 말씀하시는 스승님들로부터 진정한 학문이란, 학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몸으로 배우고 깨우쳤다. 강의 초기 문학 시간에 교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인문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 물음에 나는 첫 수업을 앞두고 인문학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웹서핑을 하던 중 발견했던, 마음에 크게 와 닿은 글귀를 말씀드렸다. “인문학은 지하수와 같은 것입니다. 지하수가 우리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만물을 생성시키는 역할을 하듯이, 인문학은 모든 학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학문의 멍석이며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듣고 스승님은 아주 좋은 표현이라고 칭찬하며 당신의 메모장을 꺼내어 스스럼없이 적으셨다. 그것은 내게 짜릿한 감동이었다. 그것이 단초가 되어 시어의 단상이 떠오를 때면 빠짐없이 메모했고, 메모들을 토대로 습작시를 쓰게 되었으며, 드디어는 시인의 꿈을 꾸게 되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 잘 쓴다는 주위의 격려에 진짜 잘 쓰는 줄 알고 죽기살기로 시간이 날 때마다 쓰고 또 썼다. 수전증으로 볼펜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려 실무자 선생님이 지원서를 대신 써줘야 했던 내가, 지금은 재산으로 팔백 편의 습작시를 지니게 됐다. 시는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상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돌이켜 보면, 다섯 번의 고시원 퇴소와 입소, 왕복 7시간이 걸린 등교와 하교, 하굣길에 막차를 놓쳐 빗속 처마 끝에서 밤 새워 책을 읽은 일 등이 떠오른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단했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완주를 해냈다는 안도와 함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동료들에 대한 존경심이 솟구친다. 입학초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격의 없는 교감과 소통은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위로했으며, 더불어 삶에 대한 애착과 인간애를 내 안에 심어주었다.

 
인문정신을 통해 얻은 신뢰와 희망

  2010년 12월 23일, 성 프란시스 대학의 한 학우가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 자신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최후를 지켜보는 것이 너무 슬펐다. 하지만 이는 인문학의 저력을 그대로 보인 하나의 사건이 됐다. 입원 초기부터 우리는 돌아가며 병간호를 했고, 필답을 통해 위로했으며, 강의 시간에 같이 배운 책들을 펼쳐보곤 했다. 급기야는 하늘의 도움인지, 포항에 거주하던 형제와 가족들을 찾아 그의 가족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영정도 없이 무연고자 처리 원칙에 따라 이름도, 성도 없이 사라지는 장례식을 경험했던 나로서는 가족, 성 프란시스 재학생, 동문 그리고 교수님들, 다시서기 관계자 모두가 참여해 ‘성 프란시스 대학장’ 형식으로 치러진 장례식을 지켜보며 모교가 너무나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죽음까지도 책임지는 세계 유일의 대학이란 이 엄청난 축복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 장례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인문정신을 더욱 견고히 했고, 나의 동문들이 서로가 서로의 장례를 책임지고 치러줄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됐다.

  그간 참 고독하고 외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않다. 다시서기의 지원으로 매입임대주택에 보금자리가 생겼고, 불안전 직종으로 전전하고 있긴 하지만 일을 꾸준히 하며, 희망을 가꾸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입학 당시)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분이 이렇듯 씩씩하게 일어선 것을 보면 너무 보람되고 기쁘다”고 격려해 주시는 교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 열심히 연습하며, 나와 세상을 신명나게 울리는 풍물패 ‘두드림’이 있기 때문이다. 학우들이 너무 좋다. 성 프란시스 대학인들이 너무 좋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우리를 아는 사람은 오직 우리뿐이라는 공동체적 결속력으로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한다. 사실, 지금은 각자의 인생과 싸워 나가는 각개전투만으로도 버거운 시간들을 통과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서로 굳게 믿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으니, 우리의 애통한 희망의 꿈이 하늘에 뜻에 합당하다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달걀을 남이 깨면 프라이가 되지만, 스스로 깨면 닭이 된다고 한다. 그간 뒤틀렸던 청개구리들이었던 우리 동기들은  스스로 알을 깨고, 스스로의 언덕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새로움으로 함께 호흡하며, 더 멀리 더 높이 뛰어 보고자 한다. 이제는 그간 갈고 닦은 인문학으로, 더 나아가서는 인문정신으로 각각 제 모습의 줄기와 열매와 꽃을 피워 낼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활짝 피어날 우리를 서로 기대한다.

  노숙인의 희망의 인문학 성 프란시스 대학, 영원히 화이팅! 

작성자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phyk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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