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감수성과 인권 사이에는 인권교육이 있다
본문
「교육의 목적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있다.」(삐디이 )
목격당하고 싶지 않은 내 신체의 장애와 국가 공인 장애인카드의 인증샷
얼마 전,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거친 액션 연기로 유명한 김보성씨가 출연하여 항상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것에 대해 “현재 시각장애 6급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발언의 맥락을 보면 시각장애 6급이기 때문에… 라고, 직접 밝히지는 않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시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선글라스로 감추고 다닌다는 뜻으로도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는 시각장애 6급이라고 발급된 장애인카드는 스스럼없이 언론에 공개하고 알려왔다는 점이다. 장애를 직접 목격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선글라스와, 국가의 여러 정책과 서비스가 공인되는 장애인 카드 공개 인증 사이의 간극은 무엇일까?
왼손잡이에게 왜 오른손잡이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는 것은 ‘차별’일까?
우리나라에는 ‘볼레로’라는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 프랑스 작곡가 라벨 (Joseph Maurice Ravel 1875∼1937) 이 만든 단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라 장조 (Piano Concerto for the Left Hand in D major) 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서 작곡된 것이다. 라벨은 이 곡을 쓰기 전에 카뮤 생상(Charles Camille Saint-Saens : 1835 ~ 1921)의 왼손을 위한 연습곡을 연구하기도 했는데 공식 공연곡으로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피아노 협주곡 작곡은 라벨이 최초였다. 오른손도 아닌 왼손 하나만으로는 피아노 연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모두가 생각하던 시대에, 라벨은 왜 도전했던 것일까?
우리는 모든 대지진에 일본 대지진처럼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고 기부하는가?
뿌리 깊은 반일 감정과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어난 일본 대지진에 우리나라 온 국민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한일 관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인다고까지 논평한다. 매 시간 뉴스에서 참극의 실상을 보여주고 2만 명이 넘게 사망, 실종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뉴스 시간마다 올라오는 사망자 숫자에 우리의 마음은 뭔가 위로해야 할 것만 같고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아 편하지 않다.
그런데 일본 대지진 이전에 2010년 1월 12일에 일어난 카리브해의 최빈국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일어난 진도 7.0의 대지진이 있었다. 당시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인구가 아이티 전체 인구의 1/3인 3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 바 있었다. 실제로 사망자는 22만 명이 넘었으며 부상자 수는 30만 명에 달하였다. 대한적십자의 다소 조용한(?) 모금운동으로 96억원의 성금이 모였으되 나중에 단돈 6억원만 해당국에 전달되었음이 드러나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2008년 5월 12일에는 규모 8.0의 대지진이 중국 쓰촨성을 강타하여 8만7,000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
이런 대지진마다 국가와 구호 단체들은 많은 물자와 기금을 냈지만 이렇게 전 사회적으로 뭔가 하지 않으면 비난받을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번 일본 대지진에는 어느 어느 기업과 연예인이 왜 기부를 하지 않느냐라고 하는 추적 기사 보도까지 내고 학교에는 학생들에게 성금을 강요할 정도이니 이는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그러나 필자 역시 중국과 아이티 대지진 때는 단순히 안타까운 큰 사건이라며 알게 모르게 지나쳤다가 이번 일본 대지진에는 주변 일본인 친구들을 찾아 연락을 돌리고 안부를 물어보곤 했다. 장애인단체들도 이번 일본 지진에서는 일본장애인 단체와 직접 연계하여 지원할 수 있는 것들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일본 대지진에 보다 민감한 것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가깝고 우리 동포가 많이 살며 뉴스 매체에 보다 강도 높게 노출되기 때문일까?
인권은 양과 수치로 그리고 친밀도로 환원될 수 없다
일본의 대지진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현상이 아이티와 중국과 다른 이유가 혹시라도 같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라든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친하기 때문이라기에 그렇다거나 일본이 다른 나라 보다 더 부자나라이고 선진국 때문이라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의 의식을 끌어당기고 있는 권력과 지위와 이념과 친밀도에 따라 우리의 측은지심과 양심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건데, 필자가 아이티나 중국 대지진에 일본 대지진보다 무관심했던 이유는 바로 위에 언급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마주보기 싫은 나의 한계, 우리의 한계가 인권과 인권 활동과 인권교육에 더욱 민감해져야 할 이유이다. 더 나아가 여러 이유와 인권의 둔감함 때문에 중국과 아이티의 대지진을 모른 척했더라도, 일본이 같은 동양인이고 우리와 더 관계가 많아서 더 마음이 쓰이는 게 반성되더라도, 일본이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릴 필요도 없고 사망자 숫자로 마음의 아픔을 가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권을 계량적으로 사고하는 것만큼 반인권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의 사회적 관계에 따라 인권의 척도, 감수성을 달리 적용하는지는 일반 대중보다 오히려 인권을 이야기하는 활동가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지난 3월 18일 중랑구청의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던 66세의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몇몇 관계있는 단체들은 분노했지만 95년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씨 분신 사건으로 인권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자랑을 일삼곤 했던 나조차도 기사 한번만 보고 넘어갔었다.
우리가 대부분 열사라고 이름 짓는 사람들도 활동가였거나 학생 운동을 했거나 우리와 친했거나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가 있을 때 더욱 크게 분노하고 더욱 민감해 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관계로 각자가 느끼고, 그 느낀 만큼 행동하고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런 한계와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자 하는 ‘인권 감수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매시간 일본 지진 뉴스를 보면서 저 엄청난 사건에서 과연 장애인들은 어떻게 대피했을까, 어떤 시스템이 있을까, 재난 방송을 잘 듣지 못한 청각장애인에게는 실시간으로 문자라도 갔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직업병 아닌 직업병일 테니까.
내 인권감수성 지수는 얼마인가?
첫머리에 말했던 김보성의 선글라스의 예와 인권감수성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핵심은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감은 우리가 쉽게 예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농담으로 너는 경증이라서 좋겠다느니, 너 정도만 되도 걱정을 안 한다느니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감일 것이다.
내 자신이 장애인이란 사실에서 비롯되는 소수성을 인정하고 당당해 지는 것과, 장애로 인한 정서적 사회적 고통과 부담은 별개의 것이다. 그것을 성찰하고 배우고 공감하는 것이 인권교육이며 인권감수성이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가?
라벨이 왼손만을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작곡자 입장에서는 가장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벨이 도전했던 것은 왼손만으로도 연주가 가능한 연주곡을 만들고자 했던 자신감과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곡을 위촉했던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비장애인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그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가져달라고 당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내 스스로 어떤 소수자들에게 ‘불가능’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은지, 그 불가능을 타개할 상상력과 확신은 가지고 있는지, 남들에게 장애는 차이라고 주장하면서 또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비장애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지 말이다. 전동 휠체어나 전동 스쿠터를 이용할 때마다 눈높이를 맞추어 달라고 비장애인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에게 불편함과 굴욕을 주지 않고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벤치를 찾는 노력을 우리 장애인들은 하고 있는가?
얼마 전부터 경기도도립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진행하는 발달장애인 고등교육 프로그램인 가온누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학생 프로필에서 일부러 장애 등급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의 여느 4년제 대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같은 커리큘럼으로 지적·자폐성 장애인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작곡가 라벨이 그랬던 것처럼, 유명한 자폐인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Temple Grandin) 처럼, 나도 그들에게 ‘모든 학생은 영재다’라는 믿음을 실천하고 싶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프다. 인권은 일상이자 습관이자 의지이자 믿음이며 실천인 것이다.
인권감수성(Human Rights Sensitivity)란?
인권감수성은 인권의식의 뿌리이고, 출발이다. 인권감수성은 인권문제가 내재되어 있는 특정 상황에서 그 상황을 인권관련 상황으로 자각하고 해석하며 그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이 다른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를 알며,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심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권감수성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다양한 자극이나 사건에 대하여 작은 요소에서도 인권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적용하면서 인권을 고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덕심리학자 레스트(J. Rest)의 도덕적 행동 과정에 따르면 한 사람이 인권을 옹호하는 행동을 하려면
① 인권감수성 과정(상황을 인권관련 상황으로 자각하고 해석하는 과정)
② 인권에 관한 판단력 과정 (어떤 행동이 인권과 관련하여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과정)
③ 인권에 대한 동기 과정 (다른 가치와 비교하여 인권이란 가치를 우선시하는 과정)
④ 인권옹호 행동과정 (인권옹호 행동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실행과정)이라는 네 가지 심리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1)
1) 국가인권위원회 사이버인권배움터 참조.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