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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인문학이 만나다

[박한용의 노숙인과 인문학의 만남]

본문

  서울역에는 대학이 하나 있다. 서울역에서 우측으로 돌아가 누가병원을 지나 얼마쯤 걷다보면 ‘성프란시스대학’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린 허름한 건물이 있다. 그 건물 2층이 대학교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 ‘거리의 대학’이다.

  성 프란시스대학은 서울시의 위탁을 받아 성공회가 운영하는 ‘노숙인자활 다시서기 센터’ 산하 노숙인 교육기관이다. 2005년 1기 신입 선생님(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 부른다)을 받으면서 개교했다. 1기 선생님들의 경우 전원 이른바 ‘노숙인’ 또는 노숙체험자들이었다. 이후 쪽방이나 독서실 때로는 임대주택에서 사시는 분들도 입학했지만, 대부분 경제적으로 극빈층이고 노숙체험자들이다.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최빈곤 사회의 바닥 꼭지점과 윗꼭지점 사이클 속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이 학교의 주인이다.

  개설 강좌는 인문학 즉 철학, 문학, 역사, 글쓰기 4과목이다. 1기 선생님을 시작해서 올해 2월 6기 선생님까지 매년 15명 내외의 선생님들이 인문학 과정을 마쳤다. 매주 4회 두 시간씩 다시서기센터 지하 식당이나 성공회 서울교구 시설을 빌려 함께 공부하다가, 5기부터 서울역 옆에 사무실을 임대해 학교로 이용하고 있다. 선생님들은 이곳에서 저녁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7시부터 수업을 시작한다.

  왜 성프란시스대학은 선생님들과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만나는가? 매 끼니가 아쉬운 노숙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 또는 일자리인데 인데 굳이 ‘가난한’ 인문학이 이들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설령 공부를 하더라도 대학 수준의 교육이 정말 가능한지, 제대로 수업을 듣겠느냐 라는 회의론도 있었다. 어떤 이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거리에서 뒹구는데 그걸 도와준들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지가 멀쩡한데 일하지 않고 거리에 ‘뒹구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만일 당신의 자녀가 직장을 구해줘도 적응을 못해 곧 그만두고 거리로 다시 나선다면,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직장을 구하라고? 노숙인의 상당수는 주민등록이 말소되거나, 파산에 의한 채무 등으로 신분이 불안정해 정상 취업이 불가능하다. 물론 노숙인 출신을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받는 경우도 거의 없을 만큼 우리 사회가 노숙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더 근본적이기도 하다. ‘사지가 멀쩡하다’고? 결코 아니다. 대부분 사지는 멀쩡해 보여도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이라고 할 만큼 병들고 약해져 있다. 한뎃잠과 비위생적인 상태, 절대적인 영양부족 등으로 대분분 호흡기나 신경통은 기본이고 암환자도 적지 않다. 특히 서울역 앞의 노숙인들이 대낮에도 술을 마시고 휘청대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노숙인의 실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태생이 노숙인인 경우는 없다. 알코올이 원인이 되어 노숙인 처지로 전락한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오히려 노숙인 생활을 하면서 알코올에 의존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추운 겨울 서울역에서 밤을 지새우자면 고통을 이길 방법이 사실상 없다. 결국 술에 의존하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알코올중독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 실제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취업난에 노숙인은 언제나 취업 기회에서 배제되어 있다. 임시직이나 일당 근로라도 하려고 해도 고용주는 노숙인을 마치 범죄자인 양 불편하게 여기며 채용을 꺼린다. 결국 한 달에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지자체로부터 받아 근근히 연명해야 하는데, 이것조차 쪽방 월세로 나가버리니 사실상 구걸로 나설 수밖에 없다. 가장 그립고 의지하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에게는 가정마저 파괴되어 돌아갈 곳조차 없다. 한마디로 노숙인은 시민사회의 멤버십 카드를 박탈당한 자들이다. 서울역을 걸어가도 그들은 서울시민이 아닌 것이다. 그 결과 정신적 황폐로 이어지는 삶, 그것이 노숙인의 삶이다.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현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거리의 ‘밥 한 그릇 자선’이 결코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베푼 자의 자선행위를 돋보이게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분들이 자기 삶의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립화’와 이들이 최소한의 삶을 떳떳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의 인식과 구조변화가 함께 가야할 문제이다. 우선은 지푸라기처럼 허물어진 자신의 속을 다시 단단히 채우고 일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너무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파악한다. 인문학은 이들과 만남으로서 한편으로는 노숙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신의 가치를 자각케 하고, 역으로 이분들을 통해 인문학은 노숙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단순한 구호 또는 시혜적 의미의 복지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복지가 하나의 인권임을 확인하고 이를 인문학의 문제의식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노숙인과 인문학의 만남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상호소통의 과정이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은 노숙인 선생님들만 배우고 느끼고 변화하는 공간이 아니다. 다시서기 센터의 활동가의 말대로 오히려 가르치는 교수, 센터활동가, 자원봉사자 모두가 배우고 느끼고 어떻게 살 것인지 같이 부대끼고 어울리는 곳이다. 배제에서 공존으로 더 나아가 차별 없는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젊은 자원봉사자가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을 때 프란시스대학 선생님들이 모두 찾아와서 용기를 주고 격려했다. 사실 노숙인에게 가장 그리운 것은 가족이고 주고받고 싶은 것은 관심과 사랑이다. 성프란시스 대학은 어쩌면 이 공간이 없었더라면 단순의 동정의 대상이나 무관심한 존재로 서로 비켜가며 살았을 이질적인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중하게 감사하며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하는 공간이다.

  그러기에 교과 과목이 현재로는 문학, 역사, 철학, 글짓기에 국한되어 있지만 반드시 이것만이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인문학이란 ‘인간이 수단이 아니고 목적인 학문’이고 “사실의 배후에 있는 올바른 가치 지향”이라는 점에서 목적에 충실한 내용이면 어느 것이나 인문학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인문의 이념을 어떻게 현장에서 구체화할 것이냐이다. 사실 노숙인들은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치 않다. 피해의식이 강하고 자기 보호 본능이 강하다. 약간이라도 감정이 상하면 견디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사회적 관계성’이 매우 취약하다. 이는 수업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더 많은 시간과 일상을 학교 바깥에서 보내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당당한 성원으로 설 수 있으려면 이러한 사회적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대학?

  사실 6년간의 어설픈 경험을 통해 인문학은 가난한 자들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벼랑 앞에서 서 있는 위기의 인간 앞에서 인문학은 벌거벗고 그 존재 이유를 검증받아야 했다. 어느 대학의 인문학이 이렇게 준열하게 자기 검증을 받았던가! 

  그러나 ‘대학’에 대한 ‘뜻밖의 더 큰 깨달음’은 2009년(2010년?) 2월 5기(6기?) 선생님들이 입학할 때 4기 졸업생인 권선생님의 축사를 통해서였다. 축사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우리 5기 선생님! 정말 입학을 축하합니다. 우리 대학은 조그맣고 사람도 많지 않지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대학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니 뭐니 하는 대학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이 만인을 웃고 눈물나게 만들었다.

  “적어도 자살을 두어 번 해본 사람만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입니다.”

  좌중엔 폭소와 박수 그리고 알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사실 우리 노숙인 가운데는 대학 문턱은 고사하고 고등학교도 다 마치지 못한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노숙생활을 하면서 사람 취급 언제 받아봤습니까. 그런 우리가 대학생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가 거리에 있을 때 누가 알아 주기라도 했습니까? 이런 훌륭한 교수님들과 함께 일주일에 몇 번씩 수업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성프란시스 대학 아니었으면 이게 가능했겠습니까. 우리가 교수님들과 지하철을 함께 타고 갈 때 지하철 안인데도 큰 소리로 교수님! 하고 부르는 것도, 우리도 대학생이다, 우리도 교수님같이 훌륭한 분들과 함께 지낸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 순간 노숙인이 아니고 학생입니다. 그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순간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과연 나는 그런 존재로 나 자신을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내 그분들을 가르치고 떠나기에 급급했지. 그 간절한 마음을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낸 적이 있던가.

  2010년 12월 4기 선생님 송년회에서 그분들이 하던 말,

  “교수님, 우리끼리 모이면 제일 많은 대화가 교수님들에 관한 겁니다. 그만큼 우리에겐 소중하고 자랑스럽고 고마운 분들이니까요”

  그분들에게는 성프란시스대학이란 대학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소외의 파도에 떠밀리다 만난 기항지이며 갈갈이 찢겨진 삶의 상처를 이따금 치유하는 위생병원이기도 했다. 그렇다! 이분들에게 대학은 수업기관만이 아니라 삶의 한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보다 더 큰…….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사실 프란시스대학의 수업은 쉽지 않았다(지금도 그렇다!) 무엇보다 선생님들에게 적합한 맞춤형 교육 전범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정고시 야학은 가난한 청소년들의 진학을 위한 것이었고, 노동자야학은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과 사회의 급진적 변혁을 추구하는 것인데, 노숙인 선생님들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과거 경험은 참고사항이지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었다. 다면 미국의 얼 쇼리스 선생이 제창한 ‘클레멘트 코스’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대화법)에 기초한 클레멘트 코스의 교수법은 유용하지만 미국이라는 사회와 역사는 우리와 다르기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우리들이 함게 생활하고 서로 부대끼면서 세워가는 미완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프란시스 대학은 노숙인 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보금자리로서는 취약하다. 재정이나 인력이나 시설도 그러하지만 교육기능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노숙인, 가난한 이들에게는 교육-복지-의료 세 가지는 함께 보장되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세발자전거와 같다. 더구나 성프란시스대학의 ‘성과’-도대체 무엇을 성과하고 기준짓느냐도 문제이지만-가 노숙인 문제의 해결을 즉각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자활의 의지를 가지고 두 발로 사회에 들어서려고 해도, 대포폰, 대포차, 주민등록 말소, 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차별 앞에서 이들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사회 구조의 변화 또는 개혁이 따라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너무나 높은 사회의 편견의 벽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어쩌면 성프란시스대학은 그렇게도 높은 사회 편견의 벽을 넘어서기 위한 문제제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 주 : 실제 성프란시스 대학 선생님들은 노숙인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있다. 노숙인이란 용어는 사회의 선입견과 편견이 있는 용어로 인식하신다. 나 또한 동의한다. 이 글에서는 일단 노숙인이라는 말을 썼지만 용어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작성자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phyk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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