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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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다. 지난 달 국회를 통과한 512조원 올해 국가 예산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외면했다. 장애계에서 선진국도 아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장애인 예산인 8조원 보장을 요구했을 때, 국가 체면 때문에라도 정부가 성의를 보일 줄 알았다. 8조원은 아니더라도 최소 그 반 정도는 올해 에산에 반영될 거라고 예상했다. 사상 최초 512조원 슈퍼예산이라기에 내심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언론에 보도된 대로 연증가분 예산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사실상 동결된 장애인 예산이 국회에서 확정됐다.
들리는 얘기는 경제가 힘들다. 세금이 덜 걷혀서 나라 살림 재정적자가 우려된다는 등 온통 어렵다는 얘기뿐이다. 마치 나라에 잔뜩 먹구름이 끼었는데 무슨 약자 형편 얘기를 하느냐며 비웃는 듯하다. 하지만 원론적인 얘기를 해보자. 정부의 역할은 국민이 내는 세금을 모아 약자를 돌보는 것 아닌가, 정부 재정은 우선적으로 우리 사회의 약자를 위해 쓰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일부 반론이 있겠지만 세금을 내는 국민 입장에서는 대부분 동의하는 얘기다. 그래서 물어보는데, 장애인을 위해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게 나라에 부담이고 도덕적 해이인가.
올해 장애인 예산을 보면 장애인 복지에서는 더도 덜도 없이 현상 유지를 하겠다는 정부와 국회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장애인들에게 더 줄게 없으니 알아서 각자 무탈하게 올해를 살라는 메시지다. 그런데 어쩔 것인가, 장애인들의 현실은 무탈하게 살 수 없는데, 예산이 지원되지 않아 일상이 되어버린 장애인들의 죽음을 보고도 눈 깜빡하지 않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저들은 누구인가, 장애인들의 자살은 없다. 오직 타살이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산 지원이 없으면 장애인들은 무탈하게 살 수 없다.
새해 초,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은 잊혀진 채 4월 국회의원 선거 얘기로 시끌벅적하다. 민생을 외면한 채 금배지 달기에만 혈안이 된 국회의원들이다. 그들은 사회안전망 확충을 이야기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도덕적 해이를 외친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장애인 입장에서 어느 당 누가 국회의원이 된들 무슨 상관인가, 총선을 앞두고 말로 화려한 장애인 복지를 늘어놓겠지만 막상 그들이 국회에 들어가서 장애인 등 약자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장애계에서는 장애인 비례대표가 국회에 들어가면 장애인 복지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국회에 장애인 비례대표가 있어도 어느새 점잖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돌변한 장애인 비례대표는 장애인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국회에서 장애인 관련 예산을 늘리기 위해 단식농성을 해도 시원찮은데, 점잖은 비례대표는 장애인을 위해 목소리도 높이지 않는다.
장애인을 위한다는 국회의원과 당사자인 비례대표가 국회에서 장애인 관련법 몇 개를 더 만든들 무슨 의미인가, 장애인 관련 법과 제도는 지금도 차고 넘친다. 문제는 예산이 뒷받침 되지 않은 허울뿐인 법과 제도여서 장애인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장애인들에게 사실상 예산을 삭감해 놓고 변한 게 없으니 무탈하게 살라고 한다. 결국 올해도 무탈하게 살아남을 수 없는 장애인은 죽어 나갈 것이고, 그나마 능력이 있는 장애인은 살아남을 것이다. 냉혹한 정글 법칙이 장애인들 앞에 놓여 있다.
힘든 현실에 놓여 있지만 그래도 모든 장애인들이 무탈하게 살아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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