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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 주민이 된다는 것

일본 오사카에서의 편지 세번째

본문

뭐, 벌써 30년도 전이지만,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일본에 대한 인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를 침략해 많은 고통을 주었던 나라니까요. 그 폐해로 우리는 오랜 세월 부정적인 식민지 역사관의 족쇄에 채워져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조국의 동란과 반세기가 넘는 민족의 분단으로 쓰라린 눈물과 아픔의 고리가 악순환되는 근대의 역사를 안고 살아야만 했잖아요.

그 역사의 큰 책임을 가진 장본인이면서 지금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얄미운 나라, 역사의 과오에 대해 솔직히 사죄하지 않는 뻔뻔한 나라 일본이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그런 나라에 와서 내가 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게 되다니…, 참으로 사람 일이란 세 치 앞을 모르나 봐요.

흑백의 추억 그리고 칼라로 바뀐 세상

그런데 11년 전 처음 왔을 때도 느꼈지만, 이 나라는 전반적으로 꽤나 안정되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90년대까지는 전국민이 중산계층이라며 자부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평균적인 살림살이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예를 들어서 일본의 경제성장이 가장 눈부셨던 시기가 60년대로, 그 당시에 이미 일반 가정에는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라는 3대 가전제품이 파급되었다고 합니다. 되돌아보면 한국에선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70년대 중반, 막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이웃집 마루에 친구들이 모였던 기억이 나거든요.(지금이야 한국도 첨단기술을 달리고 있고,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지만 말이에요.) 그것만 봐도 일본이 한국보다는 경제성장이 앞섰던 것 같아요.

도시 인프라의 면만 봐도 평균적으로 꽤 높은 수준으로 정비되어 있고요. 우리보다도 앞서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였고, 패전은 했지만 차근차근 현대화를 추진해 온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사회 모습의 정착과 더불어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발전했다고 보이고요.

어느 사회나 마이너리티인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나 정책이 가장 나중에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일본에서도 60년대부터 일어나기기 시작한 장애인들의 인권운동이 8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해, 최근에 와서야 겨우 ‘노마라이제이션’이나 ‘버리어 프리(무장벽사회)’라는 의식이 넓혀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대요.

왠지 거창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약간 아는 척을 한 것뿐이고요. 제가 이곳 사람들과 만나면서 느꼈던 인상의 뒤편에는 그런 사회적 배경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요. 오늘 꺼내려는 이야기는 제가 오사카의 한 동네 주민으로 생활을 시작하면서 기억에 남겨진 거예요.

배려하는 마음,  그 자연스러움

이곳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사는 것도 처음이지만, 결혼을 해 신혼생활을 시작했으니 제게는 모든 것이 새롭다고 할 수 있었지요. 아침에 일어나 남편을 직장에 보내고 나면 집안 청소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매일 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것이 식사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을 보러 가야 하는데, 집 근처에는 비장애인의 보통 걸음으로 5분 정도 거리에 슈퍼가 있었고, 바로 옆에 전철역까지 이어지는 긴 상점가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보통 걸음 5분이 20분은 넘게 걸리고, 시간뿐만 아니라 몸도 지쳐버리니 슈퍼 다녀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죠.

제가 한국에서는 무릎까지 하는 보조기를 신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휠체어는 쓰고 있지 않았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15년 전 서울만 해도 휠체어를 혼자서 타고 다니기에는 장벽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오사카에 와서 장애인수첩을 발급받고 구청에 2급 신체장애인으로 등록이 되자, 우선은 보조구를 지급받을 수 있었어요. 저의 생활에 필요한 보조구며, 지팡이·손잡이·휠체어 등을 리하빌리테이션 센터라는 곳에 신청을 해 전문 업자에게 주문을 하는 절차로, 그 비용은 가구 연간소득이 300만 엔 이하인 장애인에게는 무료로 지급되었어요.(지금은 법이 바뀌어 「장애인자립지원법」에 의해 정해지는데, 소득에 따라 감면이 있지만 기본은 10%를 부담하는 것으로 되었죠.)

그래서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저의 집은 연립 1층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약간 높은 계단이 한 단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휠체어를 쉽게 쓸 수 있도록 집주인이 계단에 경사로를 설치해 주더군요. 그 비용은 주택개조비로 구청에서 나온대요. 그리 절차도 복잡하지 않았고 특별히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주인이 한 번에 설치를 해주더라고요.

그리고 길에는 턱이 없고 슈퍼나 가게의 입구도 단차 없이 들어갈 수 있으며, 충분한 넓이는 아니지만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는 확보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점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물건 사는 것도 도와주고요. 일부러 부탁을 하고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 당연하게 요구를 하면 받아들여 준다는 것, 그것은 휠체어를 타는 사람을 장애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고객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신체장애인뿐만 아니라 지적장애인들도 그렇지요. 슈퍼 안에서 시장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지적장애인이 있었는데 활동보조인이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대응을 하는 사이, 직원이 곤욕스러워하거나 불만을 말하는 손님들은 없었어요. 물론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지만요.

물론 제가 사는 동네는 좀 더 이문화를 받아들이는 풍토가 있다고 보지만(재일동포가 많이 산다든가, 타지역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산다든가, 장애인 단체가 많다든가 하면서). 거리에서도 휠체어 탄 사람이나 활동보조인과 함께 외출하고 있는 지적장애인을 쉽게 접할 수 있답니다. 별스럽게 보기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 동네에 함께 산다는 것을 실감하게 돼요.

"집이 어디에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

그렇지만 장애 있는 사람이 혼자서 비장애인과 똑같은 일을 치러낸다는 것이 결코 수월하지는 않죠.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시장을 다니는 것은 그나마 낫지만, 아이가 생기니 정말 힘들더군요.

남들보다는 2배 이상 시간이 걸리니 젖먹이 아이를 혼자 두고 나갈 수도 없고, 결국 제가 탈 휠체어에 아이를 태우고 그 휠체어를 밀면서 슈퍼를 다니게 됐답니다. ‘산책이라고 생각하자. 운동도 해야 하고, 아이도 기분전환을 해야 하니까….’하며 이것저것 좋은 핑계를 붙여가며 힘을 내 집을 나서는 거지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아이에게 말도 걸어가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요.

하루는 슈퍼에 도착해 물건을 사고 돌아가려고 가게문을 나서는데, 아이고 어쩌나! 비가 엄청 쏟아지는 거예요. 혼자라면 맞고라도 가겠지만, 그리 더운 날도 아니고 이삼십 분 비를 맞히며 걸어갈 수는 없잖아요. 어쩌나…. 그때였어요. 한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우산을 들려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집이 어디에요? 내가 휠체어를 밀어서 집에까지 데려다 줄게요.”

뭐라고 고마운 인사를 해야 할지 말을 잃었어요. 괜히 우물쭈물 해봤자 시간만 걸리니, 그저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 대로 따랐지요. 휠체어에 제가 타고, 아이를 제 무릎에 앉혔습니다. 물건은 뒤에 걸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었지요. 아주머니는 자기 짐과 자전거를 슈퍼에 세워둔 채, 꽤나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휠체어에 저의 모자를 태우고 집에까지 밀어다 주었어요. 물론 돌아가실 때도 비에 흠뻑 젖으셨겠지요. 그 분 성함도, 집도 모르지만 지금도 그분의 얼굴은 잊혀지지 않아요. 정말 고마운 분이었어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럴 수야 없을 거고 눈에 보이는 편의시설도 필요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서슴없이 나서 주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면 정말 무장벽의 마을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작성자변미양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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