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장애등급 판정 받던 날
[해외의 장애인] 일본 오사카에서의 편지 ①
본문
벌써 그렇게 되네요. 일본 오사카에 와서 11년, 제 자신 스스로도 놀라 버려요.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에 와서 삶의 나침판을 찾아가며 하루하루를 산다는 게 어느새 11년, 강산도 한 번은 변했네요.
제가 현재 사는 일본 오사카라는 곳은, 한국과 비교하면 부산 같은 분위기라고 많은 분들이 말하더군요. 바다가 가깝고 사람들의 기질도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데다 표현이 적극적이라고요.
그런 오사카 안에서도 11년간 반경 2km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는 저의 집 주변은 이쿠노라고 하는 동네로, 일본 안에서도 한집 건너 재일동포일 정도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코리아 타운으로 김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에요.
제가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은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어린이집에서 유학생으로 왔던 재일동포3세 남편을 알게 되었고, 이런저런 곡절 끝에 결혼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요. 제가 오사카에 도착해서 남편에게 이끌려서 온 곳이 조선시장이라고 불리는 재일동포 밀집 지역이었고, 시댁과도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얻은 두 칸 방 셋집이었습니다.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재일동포들이 많이 사는 이 곳이지만, 겉으로 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답니다.
재일동포라고 해도 식민지 때부터 건너온 이 분들은 어느새 3세들이 주류가 되어 있고, 고달픈 역사의 뒤편에서 조국의 역사도·문화도·글도·언어도 당당히 교육받지 못한 가운데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죠.
일본말을 쓰며 살아온 긴 세월 속에 이제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일본인과 구별이 되지 않아요.
저의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늘어선 집들의 문패를 보면 누구 하나 한국 이름이 없었어요. 다만 살다 보니 ‘아, 이 분은 한국분이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어느 날 좀처럼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없는 집 앞을 지나면서 제가 어떤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그 집 아저씨가 우리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한국 사람이세요?”라며 우리말로 인사를 하시는 거였어요.
몇 년이나 살면서도 그 집에는 일본 이름의 문패가 달려 있기에 일본분이 사신다고 생각을 하던 저는 불쑥 건네 온 한국말에 오히려 당황을 해 버렸답니다. 아, 정말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구나….
자, 서두가 길어졌습니다만, 그렇게 이곳에서 살게 된 제가 생활을 하자니 처음엔 막연했지요.
아침에 일 나가는 남편을 보내고 나면 멀뚱히 방안에만 처박혀 우두커니 있다가, 어둑어둑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오는 남편만 기다리며 사는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어요. 제가 일본에서 살기 위해서는 외국인등록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서류절차가 끝나면 장애인수첩을 발급받아야 한다고요. 그래야 필요한 복지적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는데, 한국은 이제 장애인카드로 바뀌었지만 일본은 장애인수첩의 형태이고 그것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지정된 병원에서의 의사진단서가 필요했어요.
장애인 여러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겠지만 장애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요.
거기다가 저는 처음 보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의사 앞에 앉아 이것저것 몸 상태를 확인받는 것에 무척 긴장을 했답니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장애인등급판정을 ‘오사카시 리하빌리테이션 센터’라는 곳에 가서 면담을 하고 의사의 진단을 받는 날이 왔어요. 저는 일본말을 하지 못하니 데려다 준 남편만 믿고 따라갈 뿐이었지요. 우선 창구에 접수를 하고 몇 가지 서류에 인적상황 등을 기입하고 기다렸어요.
“변미양 씨!”
안내에 따라 들어간 면담실, 담당직원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잠시 적막한 시간이 흘렸어요. 서류를 훑어보던 그 직원.
“아…아? 그런데 일본 이름은 뭐예요?”
“예?”
일본말도 못하는 한국 사람을 앞에 두고, 서류에 적힌 국적이며 주소, 이름을 보고도 일본 이름이 뭐냐고 묻다니, 질문의 뜻을 알 수가 없었어요.
“일본 이름이라니요? 제 이름은 변미양 하나이고 일본이름은 없어요.”
불쾌함과 당황함이 엇갈린 저는 약간 흥분된 억양으로 대답했어요. 그후에는 무슨 질문이 오고 갔는지 기억도 안 나요. 하지만 이 일본이라는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생김새며 생활양식이 닮아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일본 사람과 같은 말, 같은 이름을 쓰며 사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 날의 일은 너무도 선명히 남아 있어요.
특히 우리 재일동포들에게는 이름을 빼앗기고 문화를 빼앗긴 역사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인데 너무도 모르는 것 같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이라는 외국에 온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장애, 문화의 장애, 이름이라는 아이덴티티의 장애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고, 전혀 알아채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눈에 보이는 신체장애등급을 판정 받으러 갔던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의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수속이 끝나 저는 지체장애인 2급이라는 장애수첩을 발급받고, 행정적 서비스를 받을 자격을 얻어 살게 되었지요. 생활하면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 등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일본, 우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밥 먹는 것 하나만 봐도 숟가락을 쓰지 않고 젓가락으로만 먹는 등 문화의 차이는 정말 많아요. 나라의 틀이나 제도, 사고방식 등 다른 점이 많습니다. 한국보다는 경제적으로 일찍 성장을 했으니 좋다고 하는 점도 있지요. 하지만 저마다 모두 다른 장애를 가지고 사는 장애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과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래도 사회적 틀과 제도가 가져다주는 안심감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죠.
저는 한국에 있을 때 길을 건널 때마다 신호등 앞에서 심호흡을 했었어요. 순식간에 깜박거리는 ‘저 파란불이 꺼지기 전에 길을 건너가야 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그래도 언제나 노란 중앙선에서 다음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지요. 장애인, 노약자가 건너기에 서울의 신호등은 너무 짧잖아요.
그런데 이곳 오사카에서 처음 신호를 건널 때 제가 길을 다 건너고 나서도 파란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답니다.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그래서 저는 이제 신호등을 건널 때 그리 조급해지지 않아요. 조금 여유 있는 신호체계 하나에서 느끼는 이 안심감, 저는 그것이 그 사회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품을 잴 수 있는 기준이 아닌가 싶어요.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바람이라도 통하게 꼭꼭 조이지 말고 품을 좀 넉넉히 하면 좋겠어요.
변미양 (지체장애인, 재일동포와 결혼해서 일보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다)
제가 현재 사는 일본 오사카라는 곳은, 한국과 비교하면 부산 같은 분위기라고 많은 분들이 말하더군요. 바다가 가깝고 사람들의 기질도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데다 표현이 적극적이라고요.
그런 오사카 안에서도 11년간 반경 2km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는 저의 집 주변은 이쿠노라고 하는 동네로, 일본 안에서도 한집 건너 재일동포일 정도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코리아 타운으로 김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에요.
제가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은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어린이집에서 유학생으로 왔던 재일동포3세 남편을 알게 되었고, 이런저런 곡절 끝에 결혼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요. 제가 오사카에 도착해서 남편에게 이끌려서 온 곳이 조선시장이라고 불리는 재일동포 밀집 지역이었고, 시댁과도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얻은 두 칸 방 셋집이었습니다.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재일동포들이 많이 사는 이 곳이지만, 겉으로 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답니다.
재일동포라고 해도 식민지 때부터 건너온 이 분들은 어느새 3세들이 주류가 되어 있고, 고달픈 역사의 뒤편에서 조국의 역사도·문화도·글도·언어도 당당히 교육받지 못한 가운데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죠.
일본말을 쓰며 살아온 긴 세월 속에 이제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일본인과 구별이 되지 않아요.
저의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늘어선 집들의 문패를 보면 누구 하나 한국 이름이 없었어요. 다만 살다 보니 ‘아, 이 분은 한국분이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어느 날 좀처럼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없는 집 앞을 지나면서 제가 어떤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그 집 아저씨가 우리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한국 사람이세요?”라며 우리말로 인사를 하시는 거였어요.
몇 년이나 살면서도 그 집에는 일본 이름의 문패가 달려 있기에 일본분이 사신다고 생각을 하던 저는 불쑥 건네 온 한국말에 오히려 당황을 해 버렸답니다. 아, 정말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구나….
자, 서두가 길어졌습니다만, 그렇게 이곳에서 살게 된 제가 생활을 하자니 처음엔 막연했지요.
아침에 일 나가는 남편을 보내고 나면 멀뚱히 방안에만 처박혀 우두커니 있다가, 어둑어둑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오는 남편만 기다리며 사는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어요. 제가 일본에서 살기 위해서는 외국인등록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서류절차가 끝나면 장애인수첩을 발급받아야 한다고요. 그래야 필요한 복지적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는데, 한국은 이제 장애인카드로 바뀌었지만 일본은 장애인수첩의 형태이고 그것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지정된 병원에서의 의사진단서가 필요했어요.
장애인 여러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겠지만 장애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요.
거기다가 저는 처음 보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의사 앞에 앉아 이것저것 몸 상태를 확인받는 것에 무척 긴장을 했답니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장애인등급판정을 ‘오사카시 리하빌리테이션 센터’라는 곳에 가서 면담을 하고 의사의 진단을 받는 날이 왔어요. 저는 일본말을 하지 못하니 데려다 준 남편만 믿고 따라갈 뿐이었지요. 우선 창구에 접수를 하고 몇 가지 서류에 인적상황 등을 기입하고 기다렸어요.
“변미양 씨!”
안내에 따라 들어간 면담실, 담당직원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잠시 적막한 시간이 흘렸어요. 서류를 훑어보던 그 직원.
“아…아? 그런데 일본 이름은 뭐예요?”
“예?”
일본말도 못하는 한국 사람을 앞에 두고, 서류에 적힌 국적이며 주소, 이름을 보고도 일본 이름이 뭐냐고 묻다니, 질문의 뜻을 알 수가 없었어요.
“일본 이름이라니요? 제 이름은 변미양 하나이고 일본이름은 없어요.”
불쾌함과 당황함이 엇갈린 저는 약간 흥분된 억양으로 대답했어요. 그후에는 무슨 질문이 오고 갔는지 기억도 안 나요. 하지만 이 일본이라는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생김새며 생활양식이 닮아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일본 사람과 같은 말, 같은 이름을 쓰며 사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 날의 일은 너무도 선명히 남아 있어요.
특히 우리 재일동포들에게는 이름을 빼앗기고 문화를 빼앗긴 역사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인데 너무도 모르는 것 같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이라는 외국에 온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장애, 문화의 장애, 이름이라는 아이덴티티의 장애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고, 전혀 알아채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눈에 보이는 신체장애등급을 판정 받으러 갔던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의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수속이 끝나 저는 지체장애인 2급이라는 장애수첩을 발급받고, 행정적 서비스를 받을 자격을 얻어 살게 되었지요. 생활하면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 등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일본, 우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밥 먹는 것 하나만 봐도 숟가락을 쓰지 않고 젓가락으로만 먹는 등 문화의 차이는 정말 많아요. 나라의 틀이나 제도, 사고방식 등 다른 점이 많습니다. 한국보다는 경제적으로 일찍 성장을 했으니 좋다고 하는 점도 있지요. 하지만 저마다 모두 다른 장애를 가지고 사는 장애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과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래도 사회적 틀과 제도가 가져다주는 안심감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죠.
저는 한국에 있을 때 길을 건널 때마다 신호등 앞에서 심호흡을 했었어요. 순식간에 깜박거리는 ‘저 파란불이 꺼지기 전에 길을 건너가야 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그래도 언제나 노란 중앙선에서 다음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지요. 장애인, 노약자가 건너기에 서울의 신호등은 너무 짧잖아요.
그런데 이곳 오사카에서 처음 신호를 건널 때 제가 길을 다 건너고 나서도 파란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답니다.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그래서 저는 이제 신호등을 건널 때 그리 조급해지지 않아요. 조금 여유 있는 신호체계 하나에서 느끼는 이 안심감, 저는 그것이 그 사회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품을 잴 수 있는 기준이 아닌가 싶어요.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바람이라도 통하게 꼭꼭 조이지 말고 품을 좀 넉넉히 하면 좋겠어요.
변미양 (지체장애인, 재일동포와 결혼해서 일보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다)
작성자변미양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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