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가 장애라면 누가 낳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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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불구 태아 낙태’ 발언으로 시끄럽다. 인터넷에 사람들이 달아놓은 댓글을 훑어보다가 “태아가 장애라면 과연 누가 낳겠냐?”는 글에 눈길이 멈췄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던 지난 일들이 추억 속의 영화처럼 지나갔다.
태아가 이상하다
임신 6개월에 한참이나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다른 의사를 불러와 뭔가를 상의하더니, 내게 태아의 뇌에 이상이 있으며 대학병원에 초음파를 잘 보는 다른 의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건 상상도 못했던 기가 막힌 얘기였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의 예후를 알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했었지만, 어떤 의사도 말해 주지 못했다. 비슷한 뇌손상을 가졌던 태아라도, 분만 무렵 뇌가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고, 8살인데 누워서만 지낼 뿐 고개도 못 돌리는 아이도 있었다.
가능성만 난무했을 뿐,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평생 지속될지 모르는 아이의 장애, 우리의 계획과 미래, 태아의 생명 등 많은 생각을 해야 했으나, 결정은 온전히 우리 부부의 마음에서 나와야 했다.
그런데 뱃속의 태아는 건강했다. 당시의 태아를 포기하려면 유도분만으로 낳은 후 처치가 필요한 미숙아를 처치해주지 않고 강제로 퇴원시켜 죽게 만드는 방법을 택해야 했고, 아기는 건강했던 만큼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다 죽게 될 것이었다.
한 달 동안의 엄청난 고민과 갈등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차마 아이가 그렇게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은 임신 기간은 큰 두려움 없이 보냈다. 분명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태어날 아기의 장애에 대한 준비를 할 수도 없었다. 한편 언젠가는 아이의 뇌가 회복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정답없는 논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산모들이 상의를 해왔다. 성심껏 이런 저런 얘기를 했으나, 어떤 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최종 선택이 어떠했는지도 모른다. 설사 태아를 포기했을지라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태아의 장애를 알고도 낳았다 하여 어떤 이는 내게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누구도 어떻게 결정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아무도 짐작하여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선택했던 것뿐, 대단하거나 칭찬 받을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남의 뱃속의 생명을 두고, 장애를 이유로 ‘포기해야 한다’거나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낳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낙태에 대한 최근의 일들을 보며 많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만일 태아를 포기한다면, 어느 정도의 장애일 때 포기해야 할까? 훗날 과학이 발전해 유전자검사로 태아의 잠재적인 질병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 병이 심각한 병일지도 모른다면? 아니면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잠재적인 범법자를 판명하는 기술이 나타난다면? 심하게 비약하여 미남미녀에 건강하고 매우 공부 잘하는 유전자의 태아만 고르는 일이 가능하다면?
이런 질문들에 답이 있을까. 낙태의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아쉬움들
막상 아기를 낳아 키우다 보니 닥친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것보다, 키우면서 부딪혔던 많은 현실적인 한계들은 실질적인 생활이기에 더 어렵고 힘들었다.
유난히 용을 많이 쓰고 엎어놓으면 곧 고개를 박고 파리해지는 아이를 두고, 신경외과에서는 돌까지 지켜본 후 재활치료를 검토하자고 했다. 내 맘대로 재활의학과를 찾아가니 물리치료를 하라고 했다. 이제 겨우 백일도 안된 아기에게 무엇이 더 좋은 방법일까 고민하다가 물리치료를 받기로 했다. 진료과를 넘나드는 협진체계가 왜 잘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젖을 빠는 힘이 약한 아기는 엄마 젖을 잘 빨지도 못했고, 분유도 젖병 꼭지의 구멍을 많이 뚫어 잘 나오도록 해주어야 먹었다. 당장 먹이는 데만 급급했던 탓에 다른 영향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입 주변 근육이 발달될 기회가 적어졌고 잘 씹지 않고 삼키는 습관까지 생겨, 언어발달지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장애의 가능성이 있는 영유아들에게 이차적인 장애를 예방할 수 있는 적절한 안내를 해 줄 수는 없을까?
두 돌쯤 되었을 때 또래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동네에 나가 어울리게 해주고 싶었지만, 다른 엄마들은 더 발달이 빠른 다른 아이들과 놀게 하고 싶어했다. 차마 거기 들이대고 끼지 못했다.
수소문을 해서 복지관의 조기교실에 대기시켜 놓았으나, 대기기간이 3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조기교실을 다닐 나이는 지난다. 다른 치료들도 이용하려면 많이 기다려야 한다. 적절한 조기교육이나 치료들을 필요한 적절한 시점에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비장애아동과도 어울리게 하려고 서울시에 등록된 통합어린이집 10여 곳에 대기한지 3년만에, 자동차로 편도1시간여 걸리는 곳이었지만 특수교사가 있고 체계가 있는 어린이집에 1:3의 경쟁을 뚫고 다니게 되었다.
1년을 다니면서 체력이 약한 우리는 매우 힘들어했다. 집 근처에서 특수교사의 적절한 지원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또래와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유아교육/보육기관에 다닐 수는 없을까?
지금은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닌다. 편식하지 않고 바르게 잘 먹어서 친구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인사 잘한다고 칭찬받는다.
뇌병변 1급인 아이는 수행능력은 매우 떨어지지만, 비록 엄마 손잡고 삐뚤삐뚤 걸어가지만, 아침마다 신발주머니 흔들면서 즐겁게 등교한다. 아이는 언제까지 이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나는 바란다
지금까지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가졌던 많은 질문에 대해서, 이 땅의 모든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앞으로 이 아이가 커가면서 가지게 될 또 다른 질문들에도 역시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그렇게 큰 욕심일까.
그리고 ‘장애를 가진 태아의 낙태’에 대해 이 사회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 한참 뒤로 미뤘으면 좋겠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정부관계자 또는 영향력 있는 사회지도층 인사라면 그런 논의에 말을 보태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도 함께 잘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정책을 마련하는 일에 보다 애썼으면 좋겠다. 이것이 그들이기에 갖는 사회적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이제 네가티브-마이너리티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말고, 그리고 욕지거리에나 등장하는 단어들은 그야말로 욕할 때나 사용하길 바란다.
나도 장애자녀를 둔 부모로서 내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노력할 것이다.
장애자녀를 둔 부모들은 우리 사후에 남겨질 아이들을 걱정하고, 오죽하면 차라리 자식을 앞세우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의학이 발전하여 대부분의 우리 자녀들도 건강하게 자라고 장년층이 되어서도 건강할 것이다. ‘아이보다 하루 더 살기’를 바라지 말고, 부모 없는 세상에서 ‘아이 혼자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태는 것이 보다 현명하지 않을까.
힘들지만 후회는 안한다
어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도 양육이란 어렵고 힘들며, 나름의 고민과 갈등을 안고 있다. 물론 복지선진국이 아닌 나라에서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장애아를 키우는 것은 더 어렵고 힘들다.
남들에게는 매우 기본적인 것이, 내 아이에게는 어려운 특별한 것이 되는 상황은 더욱 그렇다. 남들보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도 아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슬픈 일도 많고 화나고 속상한 일도 많다. 그것들을 풀어놓자면 몇 날 몇 일 눈물로 밤을 새도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쁘고 행복한 일도 많다. 장애가 있어서가 아니라, 애써 천사들이라고 위안하지 않아도, 장애와 상관없이 품안의 아이를 키우면서 얻는 기쁨과 행복은 마찬가지로 온다. 단지 조금 다른 면으로부터 올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다양한 진로를 택하며 다양한 목적을 향해 다양한 모양으로 살아가듯이, 나의 아이 역시 그 중의 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이라도 이 아이가 가는 길이라면 그 역시 길이 된다. 아이를 인정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는 두려워하며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다. 사랑도 많이 받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죽음을 떠올릴 만큼 힘든 시기에도 왜 낳았을까 하는 후회는 이상하게도 없었다.
남편에게 물으니 자신도 그렇단다. 내가 평소에 “당신은 장애아동 아빠 아닌 것 같아”라며 투정하곤 했지만 우리는 같은 마음이었다. 이것이 우리 세 식구의 인연이라 믿고 있다.
아이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을 ‘똘레랑스’라고 말한다.
그 선물을 다른 사람들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그들이 장애자녀를 키우지 않더라도, 굳이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서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면 간접적으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지금의 이런 논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지 모른다.
*** 선진희 님은 임신 6개월에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고민 끝에 아이를 낳았다. 현재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 글에 대한 저작권은 선진희 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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