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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닫으며] 씻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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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생전 처음 와보는 전주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주말도 아닌 평일에 전주에 오게 된 것은 당연히 재판을 하기 위해서다. 초짜 변호사의 딱지를 아직 채 떼어내지 못한 내가 전주에까지 내려와 언필칭 ‘전국구 변호사’로서의 외양을 띄게 된 것은 지금 내가 얘기할 그 분이 나를 강렬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3월, 겨울이 그 지친 숨을 몰아쉬고 새로운 기운이 천지를 감쌀 무렵 전주 근처 고창군에 사신다는 분의 전화 한 통화를 받게 되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통해 나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그 분은 다짜고짜로 내게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우선 무슨 일인지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그 분이 당하신 사연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그 분은 이 땅의 많은 평범한 아버지들처럼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다른 많은 노동자들처럼 산재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사고의 내용은 오른쪽 팔이 콘베이어 벨트에 끼어 절단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뇌경색을 당하여 시력장애, 기억력 장애, 좌측 팔 및 양다리의 근력장애의 상해를 입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현재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국에 말아 주는 밥을 먹는 것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사는 집은 농촌의 한 폐가이고 부인이 공공근로를 나가 버는 돈과 국가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면사무소에서 지급하는 돈이 유일한 생계의 원천이라고 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그 분의 복지에는 큰 관심이 없이 실무적으로만 일 처리를 하여 전체 장애가 아니 최초 장애, 즉 오른손 절단에 대해서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나머지 장애에 대해서는 업무상 장애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분은 나머지 손해에 대한 배상을 받기 위해  자신이 일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여 1,500만원의 조정 결정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나 버렸다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분은 팔자거니 하고 포기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회사의 대표이사이던 자가 다른 자본가들이 자주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동생의 명의로 다시 버젓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자신의 팔을 먹어 버린 그 기계를 지금도 그 때 그 자리에서 돌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위 대표이사가 다시 만든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느냐 라고 하는 것이 그 분의 말씀의 요지였다.

 나는 정말 마음 아픈 사연을 들었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또는 내가 도와주기에는 버거울 때)에 항상 그러는 것처럼 짐짓 숙연한 표정을 짓고 사정은 딱하게 되셨지만 법적으로 해결책을 찾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정말 너무도 무책임한 말이어서 두 번 다시는 안 해야지 하고 다짐하면서도 상황 면피용으로 언제나 하게 되는, 당사자를 찾아가 말을 잘하여 좋은 해결책을 모색해 보라고 하는 말을 또 하고 말았다. 보통 상담 전화는 이쯤에서 종결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분들은 대부분 ‘바쁜 변호사’가 자신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준 것으로 만족을 하고 끝까지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든지 아니면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분은 그러지 않았다.

 우선 법적으로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다는 내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법인격이 달라서 법리구성에 문제가 있다고 설명해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피해자는 전신마비 상태에서 하늘만 보며 누워 있고 가해자는 한 푼 보상도 안한 상태에서 다시 공장을 운영하는데 어떻게 법적인 해결책이 없을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그건 그랬다. 그제서야 나는 솔직히 실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법인격 부인의 법리라고 하는 것도 있고 신의성실의 원칙을 주장하여 전후 회사를 사실상 하나의 회사라고 주장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입증의 문제는 여전히 남고 위와 같은 법리는 쉽게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그 분은 그것은 귀 담아 듣지 않고 그 봐란 식이었다.

 그 다음의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내가 전주까지 가서 소송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그 분은 이미 전주에서 알아볼 만큼 알아봤지만 자신을 도와줄 변호사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구소에 연락을 했고 거기에서 변호사님을 소개해 줬는데 변호사님마저도 거부하면 더 이상 누구에게 호소하느냐고 읍소 반 협박 반을 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전주에 있게 된 것이다. 이 소송의 결과가 어찌될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송이 그 분의 마음의 원을 풀어줄 수 있는 한 판 푸닥거리가 될 것은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내가 전주에 내려오기 며칠 전, 그 분은 우체국 소액환으로 10만원을 보내 주셨다. 제비(祭費)였다. 그 분이 이제 굿판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선박수(무당)’에게 보내는 헌금이었다. 그토록 엄숙한 10만원은 처음이었다. 그 돈을 두 손에 낀 채 천지신명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자본에 할퀴어 다쳐버린 그 분의 마음을 씻어 주시고 이 선박수(무당)가 제발 사람이나 잡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음 재판은 8월13일에 다시 열릴 예정이다.

 

글/ 강문대(변호사)

작성자강문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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