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는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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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제 하에서 국무총리는 힘이 없다. 구체적으로 예산 배정권한이 없다. 그런 총리실 산하에 장애인 정책조정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있다. 이 위원회는 그동안 18차례 회의를 열었고, 얼마 전 이 정부 들어 처음으로, 회수로는 19차 회의를 열어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 및 장애등급제 폐지 추진방향을 논의했다고 발표했다.
장애인 단체장들도 참석해서 18번이나 위원회가 열렸지만, 허망하게도 결과물은 없다. 위원회는 “추진할 계획이다”, “노력할 예정이다”라는 듣기 좋은 말만 남발했을 뿐, 국가 예산 얼마를 배정해서 장애인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구체적인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위원회가 발표한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 및 장애등급제 폐지 추진방향’도 마찬가지다. 눈을 씻고 찾아 봐도 계획 및 장애등급제 폐지에 국가 예산 얼마를 사용하겠다는 내용은 없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비롯한 장애인 정책 시행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시행예산이라는 건 위원회 참석자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터다. 장애 특성상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장애인 정책 시행은 불가능하다는 점도. 그럼에도 촛불정부를 자임한, 그래서 기대를 모았던 이 정부에서도 위원회가 5차 종합계획과 등급제 폐지에 구체적인 예산을 배정하지 않고 계획만 발표한 건 실망이다.
모르긴해도 만약 위원회가 대통령실 산하에 있고, 이어 우스개 소리지만 국무총리가 아닌 기재부 장관이 위원장이었다면 위원회 회의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위원회의 막연한 계획 대신 다만 예산을 얼마라도 배정한 추진계획을 만들었을 것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얼마 전 대통령실 산하 일자리위원회는 “올해 일자리예산을 19조 2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12.5%(2조 1000억 원) 늘렸다. 정부는 이 중 63.5%를 상반기 중에 집행한다는 계획이다” 라고 밝혔다. 이게 대통령실 산하 위원회가 가진 힘이다. 반대로 국토부는 “고속버스에 휠체어 탑승 차량을 설치하는 시범사업예산으로 15억 원을 책정했는데 기재부에서 다 깎였다”라고 밝혔다.
오해가 없기를. 그렇다고 장애인들이 제대로 된 장애인 정책 시행을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 관련 예산을 평균 수준 정도만이라도 올려주기를 원할 뿐이다. 그렇게 돼서 장애인들도 대한민국에서 사는 국민들의 평균적인 삶 언저리에서만이라도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할 뿐이다. 이게 정상이 아니더라도 싫든좋든 어떤 사안과 관련해서 100번 회의가 열리는 것보다 대통령의 한 마디 지시가 더 힘을 발휘하는 대통령제 하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강조하지만 대통령제 하에서 국무총리는 힘과 권한이 없다. 그런 총리실 산하에 있는 유명무실한 장애인 정책조정위원회를 언제까지 그냥 놔둘 것인가. 정부가 말로만이 아닌 진정으로 장애인 삶에 관심이 있다면 이제는 위원회 틀을 바꿔야 한다. 위원회를 대통령실 산하로 옮기든지, 아니면 기재부 장관을 위원장 또는 부위원장에 앉혀 장애인 정책 시행에 따른 예산 편성을 강제해야만 한다.
문재인 정부가 장애인 정책조정위원회를 열어 70개 추진과제를 확정했다. 그런데 해당하는 예산 배정 계획은 전혀 없다? 한밤중의 개그도 아니고 장애인들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이 정부를 지켜봐야 하는 건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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