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외면한 현대인의 정신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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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지기 직전의 압력솥
지난 4월 6일 KBS 1TV ‘명견만리’에서 ‘F코드의 역설’이 방영됐습니다. 필자가 직접 강연하고 진행한 이 프로그램에서 풀어낸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정신건강의 진실이 무엇인지, 건강한 사회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이 글을 통해 알리고자 합니다. 가급적 방영된 내용 그대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결론을 먼저 정리한다면, 정신건강은 사회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 무형의 자본으로 새롭게 인식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쓰레기가 된 거 같은 기분인 거예요.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불안함이 항상 내재돼 있구요. 개인의 의지가 너무 약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돼 버려요 보람되는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해요 일을 잠깐 쉬더라도 그 시간에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요 한국 사회는 불가능한 목적을 설정하고 불가능한 성공의 잣대를 추구해요.
취재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육성입니다. 이분들의 이야기가 모두 정신건강의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터지기 직전의 압력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과도한 긴장과 경쟁에 사로잡힌 사회는 우리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우울과 불안, 각종 정신질환으로부터 모두를 구해낼 방법은 없을까요?
사회적 편견
40분에 한 명, 하루에 서른여섯 명.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우리나라는 2003년 이후 지금까지,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평균의 두 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점점 마음이 무뎌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단위인 개인이 이렇게 끊임없이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은, 국가의 뿌리까지 흔들수 있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절박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하는 건,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절망감은 지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분노에 의한 범죄, 난폭 운전,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 등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러한 잔혹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그 원인을 모두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소행으로 단정해버리며 또 다른 편견을 낳고 있습니다. 실제 폭력 사건 중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범죄는 0.7%, 살인사건의 경우에서는 7.3%에 불과합니다(2016년 경찰청 자료).
결론적으로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가 극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건을 부풀려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들 모두에게 전가하는 방식이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순된 현실인 것입니다. 혐오를 또 다른 혐오로 뒤덮는 오래된 사회의 적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사회적 자본의 부재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OECD 회원국 중 GDP 규모 8위의 경제대국이 됐습니다. 그런데 사회통합 수준은 최하위권인 29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소득이나 고용형태에 따른 격차가 크고, 사회제도와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느낀 좌절감과 박탈감은 결국 사회에서 받은 타격으로 인해 생긴 ‘정신적 외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마음의 고통을, 개인이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로만 여겨왔습니다. 정신질환이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정신적인 문제가 드러나면 ‘멘탈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렸습니다.
정신질환은 지속적으로 관리만 한다면,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합니다. 문제는, 마음의 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크고 제도적인 보호 장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공뿐만 아니라, 마음의 회복까지도 ‘자기하기 나름’이라며 외면해버리는 사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사회가 불행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입니다.
경제상황과 정신건강
우리는 흔히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정신건강도 나빠질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통합적 기능이 문제인 것입니다. 1990년 후반, 우리나라는 IMF 경제위기를 겪었고 그 결과 자살률은 실업률과 비례해 계속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의 사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1985년경 실업률이 10% 넘게 나타난 스웨덴에서 자살자 수는 오히려 감소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스웨덴 정부가 실직자들이 좌절하거나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지 않도록, 좋은 일터로 복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안전망이 잘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경제위기가 반드시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모든 책임을 개인이 짊어지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입니다.
재난과 정신건강
불행하게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한국전쟁, IMF 경제위기 등 거대한 심리적 상처를 많이 받아왔습니다. 가장 최근엔 세월호 침몰사고가 있었습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는 온 국민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빠뜨릴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방관자로 인식해 죄책감에 시달렸고, 한편으로는 누구도 내 안위를 돌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빠졌습니다. 이 고통은 현재도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국민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 다함께 슬픈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시작되는, ‘사회적 치유’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내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가 붕괴돼 가고 있는 사회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병의 사회학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정신의학적 증후군이 있습니다. 바로 ‘화병’입니다. 국제질병분류에도 화병이 등록돼 있습니다. 화병은 답답한 마음이나 우울하고 아픈 증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신체로 표현하는 마음의 병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에 서툴고, 고통을 잘 감내할 줄 알아야 성숙한 인격으로 인정해주는 문화가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독특한 질병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도 정신질환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연예인들이 방송을 통해 자신이 공황장애나 우울증 같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겁니다. 연예인은 자신의 본래 모습에 충실하기보다, 타인의 요구에 끊임없이 부응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또한 성공과 실패를 극단적으로 경험하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많은 연예인들이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을 앓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질환은 연예인들의 전유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인들 역시 심각한 수준의 우울과 불안을 경험할 만큼,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F코드의 공포
그러나 일반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정신적 어려움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른바 ‘F코드 공포‘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F‘는 국제질병분류에서 정신질환의 앞에 붙는 알파벳입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은 F32, 공황장애는 F41처럼 질환의 분류를 위해 사용하는 코드죠.
몇 년 전, 온라인상에서는 자신의 진료기록에 남아 있는 F코드 때문에 대기업 입사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소문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기업에겐 개인의 의료기록을 볼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이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신질환이 밝혀질 경우 혹시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난 사례였습니다.
우리나라 성인 인구 네 명 중 한 명이 평생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그중 정신과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에게 치료를 받은 비율은 22.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신건강 선진국인 캐나다와 미국, 호주의 절반 수준에 그치는 수치입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바로 사회적 편견에 따른 정신건강서비스 접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개인과 사회적 치유
정신질환의 예방과 회복은 결국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가족, 동료, 이웃들과 서로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정신질환 치료제인 것입니다.
‘피노 누아’라는 포도 품종이 있습니다. 이 포도는 다른 품종과 달리, 사람의 꾸준한 보살핌과 관심이 없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이 포도가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계속된 관심을 받아야만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모든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어쩌면 매우 이기적인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적 고통에 빠진 누군가의 모습을 보며,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나에게도 똑같은 아픔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감추고 숨길 것이 아니라, 남들 앞에 당당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보듬어줘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건강한 개인과 사회적 치유를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F코드는 더 이상 감추어야 할 주홍글씨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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