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사람이랑 다시 놀러 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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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혼자서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쳤을 때나 크게 상처받았을 때,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복닥일 때 나는 혼자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행동에 옮기기는 어렵다. 생활의 얽매임도 문제려니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다. 나는 딱 한번, 스물 세 살 겨울에 혼자서 여행을 가본 적이 있다. 그 여행은 내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워낙 돌발적인 결심이었기 때문에 내겐 구체적인 목적지가 없었다. 언젠가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안동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고속버스를 탔을 때에도 여행을 간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서울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손에 꼽고, 길눈이 어두워 어딜 갈 때에도 친구들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했던 나였기에 차창 밖의 한겨울 풍경이 막막하기만 했다.
국도를 달리는 고속버스는 위험하리만큼 속도를 내고 있었기에, 커브를 돌 때마다 몸이 이리저리 쏠렸다. 마치 멸종동물의 화석들이 줄지어 선 것과도 같은 겨울 과수원을 보며,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안동시내를 한바퀴 돌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무작정 영덕행 버스를 탔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영덕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영덕게’뿐이지만 바닷가려니 하고 찾아간 영덕은 여느 시골과 다름이 없었고, 바다로 가려면 ‘영해’로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버스를 갈아탔을 때에는 짧은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어두운 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무래도 서울사람 티가 나는 나를 둘러싸고 동네 청년들이 농담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그들이 나보다 미리 내린 것에 감사하면서 종점도 아닌 분기점에 내렸을 때는 이미 시커먼 어둠이 내린 후였는데, 버스 안에서 얼마나 겁을 먹었었는지 바다가 코앞에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 얕은 비탈 위에 ‘민박’이라고 쓴 조그만 나무판이 보였다. 대문도 없는 집에 들어가 툇마루를 두드리며 “계세요”하자 문이 열리며 숟가락을 든 60대의 아저씨가 뜻밖이라는 듯 내다보셨다. 방은 네 사람 정도가 누울 수 있을 만했고, 부부로 보이는 아주머니, 아저씨와 전래동화책에서 금방 나온 듯한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마침 식사중이셨다. 민박을 하고 싶다는 내 말에 대답도 없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고, 별 말도 묻지 않은 채 먹던 밥상 위에 밥공기 하나와 숟가락을 놓아 주었다. 밥상이 치워지고 나서, 우리 네 사람은 계속 켜져 있던 TV를 보았다. 간간이 “서울서 왔느냐”, “학생이냐”고 물으시기는 했지만 그분들은 심형래가 나오는 코미디를 보시고 내게는 별 관심이 없으셨다. 아주머니는 윗목 바구니에 들어있던 귤을 까서 반은 할머니께 반은 내게 주시면서 자신은 정작 드시지 않았다. 아저씨가 “우리 딸이 학생보다 좀 큰데 서울 가 있지” 하셨을 때는 나무람도 아니었는데 지레 민망스러웠다. 그분들은 그 좁은 방에서 함께 주무신다고 했다. 연탄 값을 아끼기 위해서인 듯 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이제 가서 자라”고 건넌방을 가리켰다. 시골에 흔한 누렁이 옆의 수돗가에서 추운 것을 참아가며 세수를 하고 들어와 건넌방에 누웠을 때,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편안했다. 파도소리가 싸르락 싸르락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고, 그 때문인지 눈이 오는 꿈을 꾸었다. 오랜만의 깊은 잠이었다.
아침에 바닷가를 산책하고 돌아오니 아저씨가 나를 부르셨다. 아주머니가 시장에 생선을 팔러 갔으니 아침상을 차리자고 하셨다. 졸지에 남의 집 밥통의 밥을 푸고 있자니 어리둥절했지만 푸하하 웃고 싶을 정도로 유쾌했다. 아침을 건너뛰는 습관이 있는 나는 내 밥공기에 밥을 한옹큼 담았는데, 옆에 서 계시던 아저씨가 “이게 뭐꼬” 역정을 내시며 밥그릇을 확 빼앗아 고봉을 만들어서 밥상에 놓으셨다. 입에 맞지 않는 비린 반찬들로 밥을 먹으면서, 무언가 뭉클한 감정도 함께 먹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점점 미워만지던 어머니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가려고 인사를 했다. 고개를 연신 흔들고 계시던 할머니가 좀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셨고, 아저씨는 신발을 찾아 신으셨다. 괜찮다는 내 만류에도 내 배낭을 매시며 앞장을 서셨다. 그때까지도 민박비를 드리지 못했었는데, 얼마를 드리면 되냐고 내가 머뭇거리며 물었을 때 “만원만 내그라” 하셨다.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하루 자고 세끼나 얻어먹었는데 밥값도 안 되는 돈을 받으시면서, 어떻게 나보다도 더 어색해 하셨다.
버스표지판도 없는 길가에 서서, 아무리 들어가시라고 해도 아저씨는 꿈쩍도 안하셨다.
그렇다고 살갑게 말을 붙이시는 것도 아니요, 묵묵히 먼 곳을 바라다보시며 담배만 피셨다.
담배연기가 한쪽 얼굴을 타고 올라가다가 흩어졌다. 바닷바람이 꽤 차가웠지만 나는 추운 줄을 몰랐다. 내 인생에서 버스를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려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불편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마워서였다. 드디어 멀리서 버스가 보였고, 아저씨는 내게 다음에 꼭 결혼할 사람과 함께 놀러오라고 하셨다. 혼자 다니는 나를 걱정하시는 것이었고, 아저씨다운 표현이었다. 애인도, 남자친구도 아니고 결혼할 사람이라니. 진부하지만 버스 안에서 나는 한참 뒤를 돌아보았고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아저씨는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버스를 쳐다보시는 것이 아니라 정면을 향해 서서 담배연기를 흩날리며. 가끔 나는 그때를 생각하며 슬며시 웃는다. 내 고단한 일상 어딘가 쯤에 아저씨가 그 길에서처럼 서 계신 것 같다. 담배연기가 얼굴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다.
글/ 김정아 (학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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