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안과 행복도 기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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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학교 때의 일이었다. 그때는 자주 재발되는 눈의 염증으로 인하여 병원 문턱이 닳도록 치료를 받으러 다녔었다. 꾸준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눈은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오히려 시력이 떨어져 가고만 있었다. 나는 차츰 당황하기 시작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어느 날 밤, 눈이 몹시 아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잠을 청해보았지만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의 고통은 점점 심해져 천근만근으로 나를 짓눌렀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여지없이 밀어 넣고 있었다. 다음날 선생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항상 사람이 많아서 일찍 병원에 가지 않으면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그날 서둘러서 병원에 간다고 하였으나 병원 문을 들어서자 접수대는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린 끝에 접수를 마친 후 나는 의자에 앉아 아픈 눈을 움켜쥐며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무렵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진찰실로 들어서면서 의례히 그러했듯이 의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였고 의사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검안대에 턱을 올려놓자 의사는 이리저리 검안경으로 내 눈을 살려보았다. 한참을 들여다본 의사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아휴, 많이 아팠겠네요. 쯧쯧.”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찡해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랬을까. 치료를 받아도 좋아지지 않는 눈 때문에 겪어야 했던 지난 날의 아픔은 나를 힘들게 하였고, 애써 지금까지 견디어 왔던 나의 마음이 그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의사는 혀를 차며 내 눈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석주씨, 지금 눈이 많이 안 좋거든요. 망막에 염증이 나서 시신경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있어요. 힘들더라도 치료를 꾸준히 받으세요. 제대로 받지 않으면 이제는 실명할 수도 있어요.”
머뭇거리며 어렵게 얘기한 의사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한 뒤 나를 치료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안약을 눈에 넣고 바른 뒤 눈을 감게 했다. 치료가 끝나자 간호사가 오더니 양손에 적외선 찜질기를 쥐어주며 눈에 대도록 하였다. 간호사는 적당히 타이머를 조절한 후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의사와 나만 남게 되었다. 침묵으로 가득 찬 진료실 내부에는 타이머 돌아가는 소리와 나의 격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하고 혼자 책을 읽는 듯한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의사가 앉아 있는 곳에서 들려왔다. 아무리 그 내용을 알려 하여도 알 수 없었다.
“딱!”
붉은 빛의 적외선은 꺼지고 타이머도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때 의사의 중얼거리는 소리도 끝이 났다. 적외선 치료기를 제자리에 갖다놓자 의사는 계속 치료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눈을 찜질하는 동안 안약이 눈언저리로 번져 범벅이 된 것을 의사가 물에 적신 솜으로 닦아주었다.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석주씨, 기적이라는 것을 믿어요. 눈이 안 보이다가 눈이 갑자기 보이는 것은 분명한 기적이지요. 하지만 눈이 안보이더라도 그 마음에 평안과 행복이 있게 되는 것도 분명한 기적이에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토록 눈이 보이기를 원했던 나에게 이 말은 도전이었으며, 일대 가치관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많은 선원들 앞에서 달걀을 세워보겠다고 한 콜롬부스가 달걀의 밑부분을 깨뜨려 결국 세웠던 것처럼 사고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었다.
늘 학교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지치고 무거워 흐느적거리기 일쑤였지만 그 날은 달랐다.
버스 안에서 흐려진 눈으로 밖을 내다보며 의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화두를 던진 그 의사의 모습이 천사처럼 느껴져 왔다. 비록 키 작은 모습의 곱슬머리를 한 중년 아주머니였지만 그녀는 분명 천사였다. 버스는 화곡아파트를 지나 오목교위를 힘차게 내질렀다. 오목교 저편으로 노을이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을 때 의사의 알 수 없던 그 소리는 나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였음을 깨달았다. 노을은 점점 나를 물들였고, 내 가슴속에서는 가만히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글/ 이석주 (대구대 특수교육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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