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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위의 파르테논 신전

함께걸음 편집자문위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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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 개월 전부터 필자는 장충동에 소재한 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팔자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혈당이 너무 높아진 것을 고지 받고 의사의 충고에 따를 것이다.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필자로서는 혼자 보행을 한다는 것은 마치 곡예사가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물체와 사람들을 피해 조심조심 다니거나 누군가와 동행해야만 한다.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체육관의 구조와 출입구의 위치 등을 익혀 나갔다. 함께 운동하는 후배가 동행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였다.

  어느 날 그 날이 왔다. 후배가 사정이 생여 드디어 혼자서 체육관을 가야만 했다. 마침 비가 오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더듬더듬 보도를 걸어 나갔다. 비까지 내려 시야가 더욱 짙은 안개에 쌓인 것처럼 흐렸지만, 장애물들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그런데 눈높이의 장애만 신경쓰던 필자는 무릎 바로 밑을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넘어졌다. 옷은 물론 찢어지고 피가 배어나왔다. 정강이가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키고, 나를 넘어뜨린 장애물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헤라클레스에게나 어울리는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을 축소해 놓은 콘크리트 파일이었다. 보도의 중앙에 박혀 있는 기둥, 무엇 때문에 설치된 것인지는 알 것 같았지만 분통이 터졌다. 자신의 건물 앞의 보도에 주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바리케이트였다.

  “미국이면 건물주를 고소할 수 있는데”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수습하고 다시 체육관으로 행했다. 그런데 이게 또 무엇인가? 나는 횡단보도의 하얀 빗금을 보고 발을 내딛었는데 다시 무엇인가 손에서 달아나 버린 소지품을 더듬어 찾아 주섬주섬 일어나서 보니 보도와 차도의 사이에 쇠사슬이 쳐 있는 것이다.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보도에 콘크리트 기둥도 모자라서 쇠사슬까지 매어 놓은 것이다. 나는 쇠사슬을 움켜잡고 잡아 당겼다. 쇠사슬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끄덕도 하지 않았다. 더 들어 가보니 쇠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쇠기둥은 바닥에 견고하게 박혀 있었다. 필자는 순가 ‘헬라클레스였으면 아니 헐크였으면’하고 생각했다. 

  불법이라는 이유로 노점과 가건물들을 인정사정없이 철거하는 구청에서 보도 위의 불법 설치물에 대해선 왜 이렇게 관용을 베푸는 것일까? 하긴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어리석다는 것을 나 자신도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이 화가 난다.

  보도에 불법으로 주차하는 인간들도 통행에 불편을 주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불법행위를 막기 위해 또 다른 불법행위를 저지른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나? 

  너무 엄청난 불법에 익숙해져서 작은 범법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이가? 주택가에 사람들은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골목길에 쓰레기통과 바윗덩어리를 가져다 놓고 건물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쇠사슬과 콘크리트 기둥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 하는 이 땅에서 장애우의 이동권과 접근권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말이 아닐까?

  필자는 이 봉변을 당하고 나서 몇 년 전까지 살던 동네의 이웃이 기억에 떠올랐다. 자신의 마당이 소방도로 건설로 조금 잘려나가게 되었는데도 더욱이 한번 철거반에 의해 담이 헐렸는데도 그 후로 다시 담을 쌓는 이웃이다. 그래서 그 소방도로는 아직도 진입로는 5미터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6미터이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다른 이웃들도 담을 헐고 새로 올리면서 그 문제의 첫 번째 집과 담을 나란히 쌓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집만 도로에서 움푹 들어간 집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런 행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집값이나 땅값은 등기상에 기재된 것만 가지고 계산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그저 조금이라도 마당이 넓어지는 것이 좋아서 그런 것인가?

  재개발 현장에서 비일비재한 냉혹한 철거반의 준법정신은 역시 돈에 팔린 준법정신인 것을 반증하는 것인가? 필자는 이렇게 수없이 어리석은 자문을 하며 지금도 보도의 불법설치물을 피해다닌다.

  기초질서를 지키는 수준을 보면 그 국민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뉴욕에서 6년 체류하면서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많은 범법과 탈법을 보았다. 그러나 뉴욕은 전세계적에서 모여든 이민의 도시이다. 그래서 미국 자본주의의 주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많은 그리이스인처럼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가서 안락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현재를 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탈법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매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한 핏줄을 물려받은 사람들과 살고 있다. 그래서 같은 말을 사용하고 얼굴생김새도 같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변하게 하는가? 썩은 정치인가? 황금만능주의인가? 교육의 문제인가?

  우리는 뉴욕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닮아가서는 안된다. 우리는 배달민족이고 우리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더듬거리며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한다. 언젠가 보도의 쇠사슬과 콘크리트 기둥과 모든 불법의 뿌리를 뽑아버릴 힘을 키우기 위해 헤라클레스처럼.


글/ 이영호 (영화인, EBS 사랑의 한가족 진행자)

작성자이영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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