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장애우 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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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에서 1975년까지는 우리 나리에서 거의 처음으로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이다.
소아마비 교육기관의 개설을 위해서 버스 값을 절약하는 모금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한국소아 마비보육협회’가 창립되었다. 또 이에 힘입어 지체 장애우에 대한 관심이 커져 중 ․ 고등학교 입시에서 낙방하는 장애우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1972년 문교부에서는 장애우에 대한 고고입시의 체능검사를 면제하기로 하였다. 이 당시의 장애우 운동은 지체장애우나 뇌성 ․ 소아마비 아동들의 복지향상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70년대 중반부터 장애우의 권익을 법률로 보장
1976년에서 1985년까지는 미약한 장애운동이 발돋움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장애우와 관련된 각종 단체가 하나하나 생기기 시작하여 1975년 키비탄, 76년 춘천 소아마비 아동복지회, 78년 한국뇌성 ․ 소아마비아복지회 등이 생겨났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시기부터 장애우의 권익을 구체적인 법률로 보장하려고 하였다. 1979년 ‘특수교육진흥법’이 처음으로 국회를 통과해 이때부터 장애우의 특수교육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일반학교에 특수학급을 설치하고 특수교육에 대한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시설 면에서도 보도를 낮추거나 휠체어 장애우가 이용하는 공중전화를 설치하는 등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80년대는 70년대와 달리 민중의 목소리가 제자리를 찾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나름대로 민중의 주체적인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였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장애우 운동측에서도 80년대 중반부터 제 목소리를 찾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들이 나타났다. 특히 1982년 7월의 전국지체장애우대학생연합회의 결성은 앞으로의 장애우청년 운동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8 장애우 올림픽 개최 반대운동으로 장애우단체들 단결
UN이 1981년을 세계 장애우의 해로 선포하면서 정부는 ‘심신장애자 복지법’을 제정하고, 신체장애우의 대학입학 제한을 점차로 축소시켜 나간 문교부의 방침으로 198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우의 인권상승이 그 전에 비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장애우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서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싸움은 1988년 4월 ‘88년 서울 장애우 올림픽 반대운동을 하면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장애우들은 ‘한국에서 장애우는 사람취급도 못 받고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정부가 장애우 인권과 복지 증진에 대해서는 노력하지 않고 장애우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것은 장애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장애우올림픽을 반대하였다. 이를 계기로 1988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국에서 1백여 명의 장애우 단체가 참여하는 ‘한국장애인총연맹’이라는 전국 조직체가 결성되었다. 이후 이 조직은 ‘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위원회’로 통합 개편되어 장애우 올림픽 반대운동과 함께 장애우의 인권회복과 평등한 사회생활을 위한 법과 제도개선 및 사회적 인식개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운동의결과로 1989년 12월 ‘장애인복지법’을 인권과 사회정의에 근거해서 전면 개정하였고, 동시에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정하여 장애우들이 일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런 모든 법은 이 위원회가 만들어서 국회를 통해 제정토록 했다. 이 후 이 위원회는 1993년 12월 ‘특수교육진흥법’을 개정하여 장애아동의 완전 의무교육을 실현시키고 1997년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 증진을 위한 법’을 제정하여 시행토록 했다. 1998년 12월 3일 ‘한국장애인복지공대책협의회’는 지역별, 기능별, 장애영역을 총괄하는 ‘한국장애인 단체총연맹’으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정책입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1988. 손말사랑회 세마나 자료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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