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인권회복을 향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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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장애우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걸어왔음을 시사하는 흔적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신체장애의 한 원인인 신체절단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신체기형을 바로잡는 정형외과적인 시도와 보철술은 인류 초기부터 일찌감치 발달된 것으로 역사(인류의 예술활동, 유골, 신화)는 전하고 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증거는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4만5천 년 전의 두개골이나 절단된 손이 음각된 3만 6천 년 전 스페인과 프랑스 동굴 벽화 등으로 이를 통해 장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뉴멕시코에는 신을 달래기 위한 종교의식으로 스스로 신체를 절단했던 관습이 조각과 그림으로 남겨졌다. 장애와 관련한 인류 최초의 문서기록 역시 신체절단이라던가 보철과 관계된다.
기원전 3,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고대의 인도의 시(詩) 리그베다에는 최초의 보철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비쉬프라(Vishpla)라는 여왕이 전투에서 다리를 잃었으나 철제의족을 달고 다사 전투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기원전 218년 2차 퓨닉 전쟁에서 마르쿠스 세르기우스는 카르타고에 대항해 전쟁을 이끌다가 신체 23곳에 부상을 입고 오른팔을 절단 수술했다. 그의 철제 의수는 방패를 잡기 쉽게 제작되었다.
기원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는 척추측만증, 만곡족, 골절과 탈구, 골관절의 염증 등에 대해 상당히 명확하게 기록했고 어깨가 빠졌을 때 쉽게 넣을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법을 개발해 일찌감치 정형 외과술이 발달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역사에는 장애우관과 장애우인권의 변천사도 새겨져 있다.
우선 언어학상으로 ‘기형’이라는 의미의 ‘deformity'라는 단어에는 신체장애라는 의미와 함께 추함, 불쾌함, 인격상의 결함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장애에 대한 편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장애우들이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상당히 유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다.
그리스시대에는 선천기형을 갖고 태어난 아기들이 정신적으로 불순하거나 기능적으로 사회에 부담을 준다고 판결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되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장애는, 특히 신체절단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다. 절단 장애는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사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졌다. 따라서 절단된 사지는 땅에 파묻었다가 그 사람이 사망했을 때 다시 파내 함께 묻는 관습이 있었다.
신체절단을 형벌의 수단으로 삼은 사례도 여러 문화권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이다.
아즈텍의 몬테주마 2세왕이 신체장애우들을 위해 왕실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한 것은 오히려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이렇듯, 장애는 본능적으로 꺼림직스럽거나 공포스런 대상이었으며 기원전 355년 철학자 아리스토틀레가 “선천 청각 장애는 지각 저하와 무능력의 원인 된다고” 정의를 내린 것으로 미루어 장애우는 무능력하고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이 보편적인 사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를 기점으로 서서히 변모를 보이고 있는데 미술사에도 이러한 변모가 반영되고 있다.
완벽한 비례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미의식과 인체미를 중시하는 그리스 미술이나 ‘아름다움은 완전한 비례를 지닐 때 이루어진다.’는 절대미에 신성이 결합한 중세미술과는 달리 르네상스시대 미술은 인간과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장애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러 편 남긴 피터 부르겔은 1568년 ‘걸인들’이란 작품을 통해 목발을 짚은 걸인들과 이를 외면하는 행인들의 모습을 대비해 명확하지는 않지만 사회고발의 요소를 담으려 한 듯 보인다. 그는 그림에 덧붙여 ‘나는 부끄러움 없이는 지나칠 수 없었다.’고 서명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장애우에 대한 미묘한 그 자신의 감정이자 당세대인의 감정이기도 하다.
도덕에 대한 각성과 계몽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로코코 시대 화가인 호가드(1697-1764)의 작품은 한결 더 성숙된 장애우관을 보인다. 당시에는 화려한 귀족의 일상을 그리는 화풍이 널리 유행되고 있었는데 호가드는 이에 반기를 들고 정신질환자를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부도덕한 귀족과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을 대비시켜 도덕의 타락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한 각성을 비로소 장애우인권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가장 먼저 변화를 일으킨 것은 청각장애에 대한 인식이었다. 1,500년대 의사였던 지롤라모 카르타노(Girolamo Cardano : 1501-1576)는 청각장애우의 이성능력을 처음으로 인정했고 1575년 스페인 법률가 라소는 말하는 법(구화를 의미하는 듯함)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농아가 아니며 자손을 낳을 권리를 당연히 지닌다고 법률상으로 명백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육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특수교육의 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1616년 G. 보니파치오는 수화인“Of The Art of Sings."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발표해 수화의 기틀을 마련했고 1777년 독일 사제인 아르놀디(Arnoldi)는 청각장애우의 교육은 네 살 이전에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청각장애우의교육을 강조했다. 청각장애우 교육기관은 이때 전후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1755년 샤무엘 하이니케가 게르만 제국에 청각장애우를 위한 세계 최초의 구강학교(Oral School)를 설립했고 같은 해 레페는 프랑스 파리에 특수학교의 효시로 볼 수 있는 청각장애우 무료학교를 설립했다.
이어 1760년 잉글랜드, 1784년 이탈리아에 이어 1817년에는 미국 청각장애우의 아버지 H. 갈로뎃이 미국 최초의 청각장애우 학교를 설립한다(후에 갈로뎃 대학으로 발전). 시각장애우에 대한 교육은 청각장애우보다 뒤늦어 1829년 루이스 브라이유가 20세의 어린 나이에 브레일 점자법으로 알려진 돌출 포인트 알파벳을 발명하면서 본격화되는데 1860년에는 브레일 점자 시스템이 미국에 도입돼 성공적인 교육이 이루어진다.
19, 20세기에 이르러 장애우의 역사에 도약이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었다. 특히 전쟁은 보장구와 장애우복지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미국 시민전쟁(American Civil War : 1861-1865)은 현대전투의 첫 사례로 기록되는데 미 연방 군대에만 30,000명의 절단장애우를 포함 무수한 장애우가 발생했다. 전쟁기간동안 대형공장들이 부상자들을 위해 하루에 수천대의 휠체어를 생산해냈고 특히 정부가 부상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보철을 보장해 소규모 수공업 상태에 머물렀던 보철 산업은 혁신적인 기술발전과 함께 대기업화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전쟁 막바지에 여러 주연방에 휠체어 여단이 결성되어 대활약을 펼쳤는데 죠지아 평원 전투에 투입된 5백72명의 메사추세츠주 휠체어 부대는 가장 화려한 전과를 거두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의 보철기술이 1,2차 세계대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철기술은 낙후되었으나 시민전쟁을 치르며 중요성을 인식하고 유럽의 기술자들을 대거 불러 기술 개발을 했다. 이 덕으로 1차 대전시 절단 병사 중사상자 수가 미국은 4천4백3명인데 비해 영국은 4만2천명, 유럽군은 10만 명으로 현격한 차이를 보였고 이는 전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쟁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장애우에게는 단말마의 순간이나 다름없다. 특히 2차 세계대전시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장애우 가스학살은 장애우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사건으로 기록된다. 1939년 히틀러는 Aktion T4라는 코드명으로 질환자와 장애우레 대해 광범위한 안락사를 지시한다.
이 계획의 목적은 “무가치한 생명”의 제거였다. 1941년 8월 23일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히틀러는 계획을 중단하지만 가스학살 대신에 약과 아사의 방법으로 이 계획은 비밀리에 지속되었다. 그 때까지 이미 10만 명의 장애우가 사망했다. 1,2차 세계대전의 뼈아픈 대가를 치르고 나서 장애우 인권과 복지, 연관 산업은 지면에 담지 못할 만큼 엄청난 변혁을 일으켜 왔다. 특히 20세기말의 유전공학의 급격한 발달로 21세기에는 장애가 정복될 것이란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장애우의 질곡의 역사는 아직도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절대다수가 국가의 장애우들은 심각한 인권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선진 국가에서 정신지체인에 대한 대대적인 불임 수술이 자행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앞으로 장애우가 가야 할 길은 멀고도 멀다. 특히 한국의 장애우를 포함한 제3세계 장애우, 여성장애우, 정신지체 장애우의 인권문제는 이제 겨우 발걸음을 떼놓았을 뿐이다. 단 한 명도 신체상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일 것이다.
우리나라 장애우의 역사는 주로 삼국유사,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등과 그밖에 여러 고문헌을 토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장애우 등 스스로 자활할 수 없는 자에 대한 구휼정책은 오래전 문헌에도 널리 나타나고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여러 가지 빈민 구제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데 그중 장애우와 관련된 정책으로 사궁구휼((四窮救恤)이란 제도가 있었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5년 “왕이 국내를 순례하다가 한 노파가 기한에 못 이겨 거의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백성을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의 죄라며 친히 옷을 벗어 덮어 주고 음식을 권하여 먹인 후 늙은이, 병든 이 등 자활(自活)할 수 없는 자를 위문하고 식료품을 주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의 복지관을 엿볼 수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모두 왕이 친히 명령을 내려 의식을 지급했다는 기록들이 여러 왕대에 걸쳐 보인다. 그러나 이 당시의 정책은 구체적인 국가의 제도로 정착한 것은 아니고 왕명에 의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서도 이전 시대와 비슷한 성격의 민생규휼이 이루어졌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제도화로 한 단계 발전해 간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장애우를 연․상시키는 독 ․ 폐질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해 때로는 곡포(穀布)를 때로는 약을 주어 구휼했고(성종대 990, 991) 왕명으로 보호하게하기도 했다.(공민왕대, 1351) 특기할 만한 것은 장애우에게는 휼형(恤刑)제도를 적용해 죄를 지을 경우에는 감형을 해주었고 요역을 면제하기도 했다.
원종2년(1260)때에 눈길을 끄는 기록이 있는데 “왕이 80세 이상 되는 노인과 환과고독, 독 ․ 폐질자에게 각각 그들을 봉양할 사람을 한 명씩 주었다.”(고려사)라는 대목은 오늘날의 가정도우미나 자원활동가 파견을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에는 구휼정책이 제도로 정착했는데 동서대비원(정종 2년 이전 설치)은 환자의 치료뿐만 아니라 기한자(飢寒者), 무의무탁자까지 수용하는 구제기관으로 문종, 충숙왕 대에 여러 차례 동서대비원에 환자를 한데 모아 구휼케 했다고 전한다.
한편 예종 4년(1109)에 설치된 구제도감(후의 진제색)은 질역의 시료(施療)와 빈민의 구제를 임무로 하였고, 예종 7년(1112)에 설치된 혜민국(후의 혜민전약국)은 의약과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 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국내 ․ 외 환란으로 재정은 빈약하게 되고 구제기관들의 기능이 정체되고 재해가 잇달아 백성들은 큰 곤경에 처했다.
고려시대에도 장애우들의 직업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매복맹인(賣卜盲人)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고려 초부터 복업(卜業)을 과거제도에 포함시켜 복인(卜人)을 선발함으로써 복업이 제도화되었다. 복업은 광종9년에 과거제도에 포함되었고, 공양왕 원년(1389)에는 잡학을 십학으로 확대 설치하여 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맹인들은 자섬부사(종 5품)와 강안전 시위호군(종 4품) 등의 벼슬을 받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복업이 맹인들의 생계수단으로 정착했고 국가차원으로 맹승들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조선시대는 유교의 정치이념인 왕도정치를 기반으로 국가행정의 새로운 기틀을 바로잡았다. 질병 치료와 예방 기민과 장애우를 수요․ 보호 등의 구휼제도도 보다 체계화되었다. 세조 30년에 장애우의 호패를 따로 정했는데 ‘형모(形貌)는 얼굴의 흉터[面瘢] ․ 애꾸눈[目] ․귀의 쪼개짐[耳割] ․ 언청이[唇缺] ․ 손발 절름발이[手足蹇] 등과 같은 것이 표징이니, 겉에 흔적이 있는 것을 쓸 것’을 규정했다. 조선시대에는 기민 및 장애우 수용 ․ 보호 기관으로 진제장과 동서활인원이 있었다. 진제장은 한성부에서 설치 ․ 운영하는 빈민을 위한 응급 구제기관으로 구급 ․ 시식이 주 업무였고 동서활인원은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와 의식을 맡았다. 특히 세종17년(1435)과 18년에 도성내의 병든 노비와 경외의 병든 행걸 ․ 인을 모두 동서활인원으로 송치하여 구제케 하였는데 활인원의 환자가 너무 많아 구료가 소홀하게 되고 사망자가 늘어나자 왕은 진제장 곁에 건물을 증축하여 무녀 ․ 노비들로 하여금 구호하도록 했다 . 동서활인원은 장애우를 보호 ․ 수용했던 기관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세조 3년에 잔질(殘疾), 독질로서 더욱 의탁할 곳이 없는 자와 맹인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를 설립하였지만 농아와 건벽(앉은뱅이) 등을 위한 보호기관이 없어 동서활인원에서 수용하게 하였다.
한편 장애우들에게는 국역을 면제했고, 형률에서도 관대했다. 장애우의 직업으로는 맹인이 전담했던 명과학과 궁중 내연(內宴)에서 맹인으로 하여금 관현합주나 가무반주를 맡게 했던 관현맹인이 있었다.
명과학은 점을 치는 학문으로 태종 6년(1006)에 설치한 십학 중 풍수음양학이 관학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후에 음양학이 분화되어 명과학으로 개칭했다. 선초에는 독경하는 매복맹인들은 모두 삭발한 맹승들이었고, 이들은 단체를 형성하여 명통사를 중심으로 자립생활을 영위했다. 국가차원에서 맹인들은 명통사에 모여 자주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 중기 이후 맹인들은 맹청을 설립하고 점복업을 발전시켰으며 맹청의 책임자에게 지중추란 벼슬이 주어졌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명과맹인제도가 폐지되고, 1907년 맹청이 일본인에게 넘어감으로써 폐지되었다.
장애우 특수교육의 도입은 구한말에 처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본, 중국에 비해 뒤늦었다. 1881년, 고종 18년 신사유람단이 일본 맹아원 교육을 처음 소개했고 1894년 5울 홀(R.S Hall)부인이 평양에서 맹소녀 오봉래에게 최초로 점자 지도를 시작했고 1900년에는 평양 정신소학교 내에 맹여아를 위한 특수학급을 개설해 국내에도 특수교육이 시작되었다. 일제시대의 구빈사업은 일본의 왕들이 보낸 은사금을 기금으로 하여 그 이자를 수입을 주요 재원으로 했고 부족한 예산은 국가의 재정에서 충당했다. 그러나, 이는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이루어진 정책이었다.
구체적인 제도로는 1944년 이르러 한국인에 대한 징병과 노무 징용에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구호령이 제정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913년 제생원을 설립하면서 침 ․ 구 ․ 안마업이 도입되어 점술에만 한정되었던 맹인의 직업이 확대되는 계기를 맞았다.(『한국장애인복지변천사,』 한국재활재단 편, 19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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