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우 일상다반사18 > 대학생 기자단


중증장애우 일상다반사18

7년이란 세월을 감옥같은 시설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본문

 우리 사회에서 "복지"하면 많은 사람들이 "시설"을 떠올린다.
그렇다면"시설"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과연 여기에 동의할까.
 이 글은 지난 5월 27일에 있었던 "참여정부의 사회복지시설정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토론회 자료집에 실렸던 박정혁 씨의 글을 간추린 것이다.
 현재 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박정혁 씨는 지난 7년간 시설에서 생활했던 당사자로써 현 정부의 시설중심 복지정책에 대해 누구보다도 할 말이 많다.
 이번 중증장애우일상다반사에서는 박 씨의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복지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시설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점을 던지고자 한다.

1996년, 저는 집안의 경제사정 악화로 강원도 철원의 모 장애인 요양원으로 저의 삶터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27세, 몸이 멀쩡했다면 한창 일할 나이였죠. 하지만 전 중증의 뇌성마비 장애우였고, 당시 저의 짧은 생각으론 거기밖에 갈 데가 없었다고 생각했죠. 저는 그곳에서 많은 장애우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7년을 살았습니다.
처음 그곳에 입소했을 때, 저는 어리석게도 장애우는 의례 그렇게 살아야 되는가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밥을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자라하면 시키는 대로 자야하고, 깨우면 일어나기 싫은데도 일어나야 하고, 장애우들은 항상 열등한 존재이며, 부족하기에 비장애우들의 동정과 시혜 속에 시설에 수용되거나 가족들에 보호받아야 되는 그런 존재인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입소 이틀 후, 보모 손에 이끌려 강제로 머리를 깎여도 항의조차 못했고, 어느 날 아침, 우리 방에서 함께 자는 자폐장애를 가진 어린 친구가 세수를 하고 나와 보모의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보모에게 걸려서 단지 자신의 수건을 썼다는 이유로 흠신 두들겨 맞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마음만 아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설에서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본인들의 동의절차도 생략되고 소풍간다는 말에 속아 그곳에 입소한 장애우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육체적 장애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론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들인데도 이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글에서 그곳을 운영하는 자들의 시설비리를 논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여러 군데 터져나온 터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시설 속 장애우들의 인권을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있던 시설은 저 외에 약 거의 500명의 장애우들이 입소해 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정신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었고 저와 비슷한 장애 유형도 약 10% 가까이 됩니다. 우리들의 하루일과는 6시 기상, 7시 30분 아침식사, 12시 점심식사, 5시 30분 저녁식사, 7시 취침, 이것이 500명 규모의 시설의 하루생활입니다. 대부분의 그곳의 장애우들은 이런 식으로 생활합니다. 이들에게 개인 시간은 없습니다. 봄과 여름철엔 일광욕 시간이 있는데 이것도 단체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일 뿐입니다.
1년 12달 매일의 하루일과가 이런 식으로 똑같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며칠 전 그곳 시설에서 한 장애우 분이 저희 집에서 하루밤을 묶고 돌아가셨는데, 시설에 있을 때부터 친분이 있던 터라, 함께 여의도에 가서 놀다가 하루밤 더 묶고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저녁이 되자 갑자기 시설에 들어가야한다며 서둘렀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시설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 말이 외출증을 끊을 때 오늘 날짜로 끊었고, 함께 데리고 나온 정신지체인 친구 때문에라도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부랴부랴 자원봉사자를 구해 리프트가 장착된 차로 모셔다 드렸는데…, 철원으로 향하는 차안에서의 그분의 표정이란…
장애인 생활시설의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오갈 데 없는, 사회에서 일도 못하고,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 당하는 곳일까요?


감히 말하건대 우리나라에서 장애우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부터 그 장애우에겐 불행의 시작입니다. 저는 뇌성마비 장애우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남들 다 배우는 의무교육도 받지 못했고 27년간 했던 외출은 1년에 한번 될까말까였습니다. 그 뒤 7년이란 세월을 장애우 시설에서 옥살이 아닌 옥살이를 했습니다. 전 그곳에서 장애의 아픔을 느꼈고 차별 또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장애우들의 삶이 고작 이것 뿐인가란 푸념도 했었고요.
텔레비젼에 나오는 교도소와 제가 살던 시설의 풍경이 흡사하단 생각도 들더군요. 교도소에는 수인번호를 수인의 앞가슴에 붙이고 있는데, 우리들도 방번호를 앞가슴에 붙이고 다녔고 머리 역시 수인들처럼 남녀 구분 없이 짧은 커트를 쳐야했습니다. 감기기 좋다나 뭐라나 하는 이유로 말이죠.
어째서 이렇게 장애우들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시설은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모든 장애우들을 획일화 시키려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을 보다 손쉽게 관리할 수 있으니까요.
저도 입소 후 1년간은 시설의 시스템대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시설 시스템에 대한 가벼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고 그에 대한 첫 단추로 글을 창작하며 반란을 꿈꾸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그곳에서 시인으로 알려졌고 사무실에서도 저의 노력을 귀엽게(?)봤던지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고 문예창작동아리 운영을 한번 해보라며 컴퓨터를 한대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손님이 올 때 마다 저를 시설 홍보 하는데 활용(?)하더군요. 저는 그 공간을 반란의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맘 먹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필요했고 문예창작 활동에 필요하다는 구실로 자비로 전화를 놓고 컴퓨터에 모뎀을 달아서 인터넷을 시작했습니다.
자립생활이 뭔지도 노말라이제이션이 뭔지도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외국의 사회복지 체계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복지가 경제 수준에 비해 상당히 미달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2003년 저와 절친한 전도사로부터 장애인자립생활지도자대학 수강 공모 메일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저는 시설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입소해서 첫 번째로 해본 일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33년동안 저는 한번도 지하철을 타본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처음 해본 일이 어디 지하철 뿐이겠습니까? 센터 식구들과 함께하며 노래방도 처음이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셔본 것도, 동료들을 따라서 집회에 나간 것도, 가게에서 스스로 물건을 사고 값을 지불한 것도 처음해보는 경험이었습니다.
비장애우들은 눈 뜨면 늘상 하는 일들을 33년동안 몸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것이 과연 저만 못해본 것들이었을까요? 저는 센터에서 활동간사로 일하면서 중증의 적지 않은 재가장애우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얘기해보면 한결

같이 저의 33년 이전의 생활과 다를바 없는 생활들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세상에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의 욕구들을 억제 시키며 자신이 움직이면 가족들에게, 또는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피해의식 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을 누가 가둬놓았나요? 우리 사회는 장애우들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거리에선 높다란 턱과 계단이 즐비하고, 건물들은 대부분 저와 같은 휠체어 탄 장애우들에겐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 구조입니다. 버스도 탈 수 없고(서울에 저상버스가 다니지만 가뭄에 콩나듯 다니죠.) 서울에선 그나마 장애인콜택시라도 있어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기다리면 오지만 지방에선 그나마도 없는 실정입니다.
엊그제 우연히 국회방송에서 장애인특별소위 위원장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나라에 장애우 복지 예산이 전부 6천억(8천 억이던가?)원이라 하더군요. 처음에 저는 그것이 꽤 많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나라 전체 예산에 0.06%밖에 안된답니다. 이런 금액 중 장애우 생활시설에 투입되는 돈이 얼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과반수 이상이겠지요. 그러나 장애우 생활 시설 속에 장애우들의 삶은 여전히 최악입니다. 가족들에 보호를 받는 재가장애우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우리나라 장애우들은 언제까지 죄인취급을 받아가며 살아야 합니까?
저는 지금 현재 동대문구 소재 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간사로 일하며 33년간 배우지 못한 인생에 모든 것과 장애인자립생활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립생활의 핵심은 장애우 당사자의 자기 선택과 결정, 그것의 결과에 대한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나 여지껏 우리 사회는 장애우 당사자가 해야 할 모든 선택과 결정들을 장애우를 책임지고 있는 가족들과 그 장애우를 수용하고 있는 관리자에게 부여해 왔습니다. 때문에 장애우 당사자는 좋건 싫건 가족들과 관리자의 일방적인 의견을 따라야 했습니다.
장애인자립생활은 가족과 관리자에게 맡겨진 장애우 당사자의 권리를 당사자에게 되찾아 주는 이념입니다. 저는 지금 그 이념대로 생활하며 행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장애인 연금도, 활동보조인 제도도, 이동권도, 시설에 대한 접근권도, 아직은 우리나라에 도입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 아직은 많이 힘들고, 위험한 일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장애우 복지제도인 장애인자립생활(IL)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저의 작은 힘이 보태어지도록 노력하는 것 자체가 저에겐 참 행복한 도전입니다.

글 박정혁(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간사)

작성자박정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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