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의 진실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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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이맘때 일이다. 취재를 하기 위해 강원도 속초에 있는 한 장애우 이용시설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한 장애우를 만났는데, 그는 사십대였고 근이양증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밤늦은 시각이었다. 인적 드문 길가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어렸을 때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시설에서 자라다가 또 다른 시설로 옮겨왔는데, 오늘 시설을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다며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고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그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토해낼 것 같은 낙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 밀어주겠다는 호의도 사양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손에는 소주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둠에 빨려 들어간 그의 작은 휠체어를 참담한 심정으로 내내 지켜보아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시설에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른다.
얘기를 더하면, 몇 달 전 이 지면에도 썼지만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가보면 하릴없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장애우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벤치에 앉아 단지에 사람들이 나타나면 공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하루 일이다. 마치 하나의 정물같이 그들은 좀체 움직일 일이 없다.
사람들은 흔히 소외의 대명사로 장애우를 거론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애우 소외의 진실은 과연 뭘까, 각자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소외의 진실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예다. 너무나 간단하게 세상에서 머물 곳이 없어지는 장애우 개인의 아픔. 그리고 거세당한 채 무리에서 외면당하고 그들끼리만 모여 있는 장애우들의 고립, 이게 장애우 소외의 내막이다.
이 중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장애우 개인의 아픔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애우들이 힘들어하는 배경에는 모두 장애가 있다. 외로움을 얘기하면 그 배경에는 역시 장애가 있고, 살기 힘들어 죽고 싶다고 말하면 그 배경에는 역시 장애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롭고 힘든 건 비장애우들도 마찬가지라고 반박하겠지만 사정은 전혀 다르다. 장애우는 장애 때문에 더 많이 아픈 것이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사람들이 장애우가 아니라 장애우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장애우 개인의 아픔은 무시하고 장애우들이라는 거대 담론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어떤 제도가 바뀌고 개선된다고 해서 장애우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픔이 치유될까, 고용촉진법이 있지만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우들이 있는 것처럼 아픔은 절대 제도 개선만으로는 치유 받을 수 없다.
덧붙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장애우의 아픔을 대하는 태도의 가벼움이다. 주위에서 장애우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하면 또 그 얘기한다 라며 가볍게 받아넘기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특히 장애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사람들이 이런 가벼운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더 심하다.
적어도 그들에게 장애우가 대상이 아니라면 이런 가벼운 태도는 시정되어야 한다. 장애우들이 아프다고 말하는 건 괜히 하는 말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장애우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해 버리는 건 아닌지. 개인의 고통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그리고 ,비단 두 가지 예가 아니더라도 장애우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소외의 진실이 뭔지, 그 소외의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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