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잠 좀 돌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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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굉음을 울리는(본래는 뛰어난 작곡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했겠지만) 지긋지긋한 핸드폰 알람 소리가 끊임없이 울린다. 중간에 왜 집어넣었는지 모를 히스테릭한 닭소리가 나를 두 번 죽인다. 잠자리를 같이 하는 동생의 친구이자 활동보조인인 상용이와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버팅기기를 한다.
나는 잠이 부족하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렇게 적게 자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내가 다 신기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잠잘 때, 이제는 옆 사람을 깨우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장애가 심해지면서 자는 것이 나에게는 이라크 전쟁 같았다. 얌전히 자는 나를 너무 좋아한다고 방바닥에서 찌르기, 사방에서 팔다리 잡아당기기, 심지어는 관절 꺾기 무공, 급기야는 조르기 한판(고마해라 그만하면 됐다 아이가)으로 들어올 때 아주 죽여준다.
여자 친구가 이런다면 이러면 오죽 좋겠냐만. 우리 집 2층에 있는 D형, 밤 사이 열 번은 깨어 도와줄 수 있는 무공의 소유자지만, 나도 지난 십년간 이런 고생을 지낸 터이다. 오죽하면 가족조차 두 손을 들었을까.
고통 끝 행복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겨울쯤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유래카!’를 외쳤다.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이다. 지난해 독립을 하면서 거금 220만 원을 투자해 이동형 리프트(몸을 들어 이동시키는 기구)를 구입했다. 일본 사이트를 뒤지던 중 중증장애우들의 체위변환을 돕는 보조 기구(체위 어쩌구라는 단어 때문에 거시기한 도구로 생각하면 상당히 곤란하다)가 복지용구로 지원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벽에 고정시킨 전동기에 천을 붙여 그것을 몸에 감싸 리모콘으로 조정하게 한 기기였는데 여기에서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리프트를 잘 이용하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거의 완벽하게 다리와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되어, 지난 십년간의 고민을 말끔히 털어내게 되었다. 진작에 리프트를 구할 생각을 했더라면 동생과 부모님의 편안한 밤을 빼앗지는 않았텐데…
그렇다고 충분한 숙면을 취하게 된 것은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잠 문제는 해결됐지만 나의 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비몽사몽 중에 손에 쥔 리모콘으로 리프트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여명이 밝아온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맑지 않은 상태에서 세면대로 간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세수를 하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는데, 호흡 기능이 약해진 상태여서 숨이 ‘턱’하고 막힌다. 곧이어 나는 단말마와도 같은 상태로 들어가 30초 버티기도 힘들어진다.
세면 도중 여러 번 멈춰 세운 후, 이 지난한 작업이 끝나면 살아있다는 것에 잠시나마 충만한 기쁨을 만끽한다. 지금은 휠체어에 몸을 벨트로 고정시켜 해결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기상하면 리프트로 실내용 휠체어에 옮겨 타고 물막이 천을 이중으로 몸에 두르고 세면실로 간다. 휠체어와 몸을 벨트로 묶고 세수를 한다. 다음 전동칫솔기를 고정시켜 얼굴을 상하좌우로 움직인다. 면도를 하고 양말을 신으면 1차 준비는 끝.
그 다음 비로소 장애우 콜택시를 부른다. 콜이 된 다음 리프트를 다시 몸에 걸고 외출용 전동휠체어에 옮겨타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지난해 1월, 나는 독립했다.
노부모님이 더 이상을 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충분한 준비없이 시작한 독립이었지만 운도 따랐고 주위의 도움도 적절히 받았다. 물론 캐어비와 보장구 구입비 등만으로도 1년 월급의 대부분인 천만 원 이상의 비용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생활은 적잖은 위험을 동반하고 있었다. 빗길 고가도로에서 우비가 바퀴에 걸려 생사절명의 위기를 맞았고 웅덩이에 휠체어가 엎어진 일, 저체온 증세와 가래로 단말마의 위기를 넘겼던 일, 혼자 방에 있다가 몸이 기울어 위기를 넘긴 일 등 여러 차례 목숨이 오고가는 일들을 겪어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당하고도 다음날은 멀쩡하게 출근하곤 해, 아마도 나의 위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난 1년간 효창동 한벗회관 생활을 마감하고 한달 전쯤 연남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온 후 가장 즐거운 일은 조카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녀석은 나 어렸을 때를 꼭 빼앗았다. 어릴 적 사진을 비교해 보면 구분이 안될 정도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잘생긴 조카를 바라보다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한마디한다. “그래요. 아기 때는 다 이쁘죠…”
한국근육디스트로피 장애인협회에서 일하는 제수가 출근하면서 일주일에 한두번은 부천 집에서 조카를 데리고 온다. 며칠 못 본 사이 조카는 부쩍부쩍 커있다. 이제는 ‘걸음마’ 과목과 ‘이(거) 뭐야’ 등등의 어학 코스, ‘살인 애교’ 과목까지 완전히 마쳤다. 내 조카는 천재인 것 같다. 걸음마도 떼기 전인 아주 옛날(한달도 안됨) 언제 눈여겨 봤는지 전동휠체어 조이스틱을 사정없이 당기는 통에 아찔했다. 조이스틱이 책상 밑 부분에 들어가 있어 눈에 띄지 않았는데 거기에 손을 넣어 당긴 것이다.
또 어느 날, 내 방을 나가다 말고 방문을 잡고 선 채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문득 “삼뚠(삼촌), 뭐 쫌(좀) 도와 주까요(줄까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내 조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이쁘다.
매일 밤 우리 집에서는 조그만 파티가 펼쳐진다.
우리 집에는 동거하는 몇 남자가 있다. 내 방문을 열면 거실에 이층 침대가 있고 그 이층에 나랑 동갑내기인 공무원 친구가 잔다. 거의 만물박사라 할 정도로 잡다한 것을 많이 아는 친구인데 장애우 정책에 할 말이 많다고 기회가 되면 참여하겠다 한다. 아래층 침대는 늘 주인이 바뀐다. 주로 나하고도 십여년 알고 지내는 자원활동가들의 차지이다. 그 중 인철이는 잔디회에서 이미 스무해가 넘도록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의리파다.
밤에는 2층 D형을 케어하면서 밤을 같이 보낸다. 사실 업히는 동작은 가슴이 눌려 호흡하기가 어려워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 되었지만 요즘은 이 친구에게 종종 업힌다. 우리의 동거 세력 중 하나인 영남이는 한동안 연구소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렸던 풍물패 소리내기의 한 일원이기도 하다. 영남이도 십여년을 변치 않은 활동가다.
이들에게는 ‘유료 도우미’라는 개념은 낯설기만 하다. 두 사람 모두 이십대에 만나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변함 없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아직도 이렇게 숨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사람들이 많은 데 국가와 사회가 자원활동을 활성화는 어떠한 노력이라도 한 적은 있는지 묻고 싶다.
대강 이렇게 멤버가 구성되면 통닭 한 마리를 시킨다. 조류독감 열풍이 기승을 부리던 때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굳건히 BB헬~~ 통닭을 한 마리 이상 시켰다. 이젠 16대 국회의원처럼 지긋지긋한 메뉴여서 바꿔 보자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그래 결정했어 통닭으로. 오 이런! 통닭 한 마리에 맥주 한 캔이면 우리 식구들은 만만치 않은 인생의 괴로움들이 씻겨나가는 착각을 갖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부터 잠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안전하게 잠들 수 있도록 잠자리 안전모드 세팅을 한다. 아참 발등의 붓기를 빼기 위해 양다리 밑에 커다란 쿠션을 받친다. 이렇게 오른발 다리 쪽과 오른쪽 어깨 부분에 리프트 줄을 걸고 오른손에 리모콘을 끼운 다음 개구리 포즈가 취해지면, 나를 너무 사랑해 주는 보이지 않는 적과 전투 준비가 끝난다.
부시야 나는 전쟁이 정말 싫다. 제발 싸움 걸지 마라.
나는 짐짓 이 밤의 전쟁의 책임을 부시탓(?)으로 돌리며 눈을 감는다. 마지막으로 늦은 밤까지 그리고 아침까지 보디가드역을 맡을 상용이가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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