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의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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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평택에서 ‘평화페스티발’이 열렸다. 국내의 모든 미군기지가 향후 몇 년안에 평택지역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택주민들은 물론이요, 이땅의 평화를 지키자는 사람들 몇천명이 모였다. 행사는 새벽까지 전국에서 올라온 각종 공연과 평화메세지로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공연내내 눈에 띄는 현수막 문구 하나가 선명하게 남았다. 바로 “가난하게 잘살기”였다.
‘가난하게 잘살기’라… 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모순된 말이 또 있을까? 물질 중심적인 우리 사회에서 ‘잘살기’란 물질적 풍요를 전제한다는 데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인데, 여기에 ‘가난하게’라는 부사가 붙어버리면,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가난과 풍요’라, 이건 어쩌면 상반되는 단어가 아니던가?
예전에 TV에서 ‘1달러로 하루를 사는 사람들(제목 불확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한적이 있다. 이디오피아, 방글라데시 등에 사는 아이들이 그 다큐의 주인공이었는데, 어린아이들은 빈민촌에서 나와 도시로 가서는 구걸하는 것이 하루의 노동의 이었고, 좀 크면 (구걸이 잘 안되니까) 땡볕에 앉아 벽돌 깨는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각 상점의 앞에서 문을 열어주면서 손을 내미는 아이들, 동생들과 줄줄이 나와서 찻길가에서, 육교위에서, 길 한쪽에서 애처로운 표정과 깡마른 손을 내미는 일들로 가족 모두의 생계가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들은 도대체 뭐하냐? 그들도 일한다. 일자리가 있으면 최대한. 그러나 자리가 없다. 벽돌 깨는 일들도 아이들과 여성들을 시키는 이유는 임금이 싸기 때문이요, 남성들은 일당이 비싸다는 이유로 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전 필리핀을 다녀왔는데, 그곳도 사정은 비슷했다. 하루일당이 5천원인 나라, 강변을 따라 줄지은 빈민촌들이 빼곡하다. 가톨릭국가라 낙태를 하지 않아서 한가정당 8명이 평균 자녀수란다. 밤늦게 맥주집을 찾아 뒷골목을 다니는데, 길가에 노숙하는 엄마와 줄지은 자녀들이 전시물처럼 늘어져 있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 말고, 거리에 다니는 휠체어를 탄 사람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우리가 묵은 호텔외에 뒷골목은 정말 다니기가 힘들 것 같았다. 도로 위에서 달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런데, 필리핀은 왜 이렇게 소위 가난한 나라가 됐을까? 사람들이 게을러서? 자연재해가 심해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외국의 경제제재가 심각해서? 아니다. 결코 아니다. 필리핀은 상위 5%의 사람들이 필린핀의 부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국의 토지와 온갖 부를 독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의 독점을 통한 정치적 독점까지 확대해 갔다. 먹을 파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먹을 파이를 5%내에 드는 사람들만이 먹고 있는 ‘분배’의 문제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장애인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이야기하자니, 이들에게 너무 먼 이야기였다. 장애가 있건, 없건 “모두가 가난하게 못살기” 때문이었다. 일부가 너무 부자였기 때문에…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가난과 풍요를 마치 자석의 양극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난 다시 생각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먹을 파이를 키울때가 아니라, 파이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질적 풍요를 이룬 뒤에 분배를 결정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분배방식은 사회의 풍요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분배만 잘하면 우린 얼마든지 ‘모두가 가난하게 잘 살수’ 있다.
글 김정하(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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