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영철 사건] > 대학생 기자단


[장애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영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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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화된 경험, 살인을 추억할 수 없는 여성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장면을 패러디한 코미디 프로를 볼 때마다 우습기는커녕 그녀들의 죽음이 아파서 고통스러웠다. 그 영화를 패러디하는 남자배우들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고 그녀들의 죽음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성별화된 경험인가. 여성들은 살인사건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렵다. 아무 죄 없이 죽어가야 했던, 나와 같은 시공간에 살고 있던 그녀들과 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일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언론에서 잘못된 시각으로 일관하고 심지어 유영철의 팬 카페까지 생겨나는 현실이 더욱 고통스러워 피해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생각하는 글을 써보고자 했다.

‘일반 여성’은 없다
범인인 유영철은 자신이 부유층이라고 생각한 노부부 등 8명과 소위 업소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11명을 살해했다. 그는 썩어빠진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장렬한 의식을 치른 듯 당당하다.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여성들, 즉 자신의 전처와 새로운 연인에게 상처받았으므로 여성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가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몸가짐 운운한 것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이고 여성 혐오적이었으나, 우리 사회가 가진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발언이다. 언론에서는 그 논리의 부당함을 지적하기보다는 ‘일반여성’과 ‘유흥업소 종업원’을 구별하며 일반여성의 죽음에 더 애도를 보내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일반 여성’과 ‘업소 여성’을 구분하고 업소 여성의 생명과 가치를 더 낮게 매기는 것은 남성들의 기준일 뿐이다. 그녀들에게도 똑같은 삶과 꿈이 있고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오히려 그녀들이 부족한 사회적 자원 때문에 원치 않는 일거리에 내몰리고 있지는 않았는지에 더 집중해서 그녀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해야 하는 것이다.

공허한 명분
기본적으로 명분 있는 살인이란 존재하지도 않지만 그의 ‘명분’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그가 택한 대상들이 너무나 손쉽게 접근가능하고 사회적 보호망 없이 그야말로 몸 하나로 세상을 버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약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기는 쉽다. 때문에 그 반대의 경우일 때에만 사회적 제스츄어는 그 의미를 가진다. 자기 인생의 한풀이를 자신보다 약자인 노인과 여성들을 상대로 풀고 거기에 부자와 ‘더러운 여자를 마치 청소했다’는 듯한 발언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사람을 죽이고도 당당할 수 있는 그를 지탱하는 것은 ‘남성’이라는 정체성 하나뿐이다.

나를 지켜줄 남자?
이 사건을 통해 여성들은 오래된 진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나를 지켜줄 나의 남자’라는 대상의 공허함이다. 유영철은 자신의 전 부인을 살해하려 했지만 아이가 불쌍해서 동종업계의 다른 여성들을 죽였다고 한다. 해마다 미국에서 살해되는 여성의 70%가 전/현 애인/남편에게 살해당하고 있다는 현실과 비슷하다. 연쇄살인사건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여성이 남성에게 매맞고 성폭력과 폭력에 시달리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남성에게 여성은 ‘보호할 대상’이 아니면 ‘함부로 해도 되는 대상’이지만, ‘보호 대상’일 경우에도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교육시키거나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수많은 가정폭력), 보호 영역을 벗어나더라도 여전히 과거 소유로서 지배받아야 한다(과거 애인/남편들의 살인). 이런 시나리오가 분명히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이 사건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 살인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여성들이 죽어가고 그 희생자들은 대부분 한 남자의 여자, ‘성적인 존재’로 기억될 뿐이다. 그녀들의 삶과 고민과 걱정과 성격과 사랑들은 그저 한 남성의 비뚤어진 욕망에 의해 단순하게 지워진다.

 

모든 스트레스와 분풀이는 약자에게 흐른다
장애여성 역시 폭력과 인권침해의 중심에 있다
약한 사람들에게도 ‘인권’이 있다
‘업소’ 여성이 아니라, 업소 ‘여성’이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 재정립이 시급히 필요하다




현대판 마녀사냥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여성이나 남성을 불문하고 누구나 불안심리가 가중된다. 이럴 때 남성들은 자신보다 약자인 여성들을 상대로 그 불안심리를 해소하려 들기 쉽다. 중세유럽의 마녀사냥이 그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마녀사냥은 국가와 종교까지 결탁하여 여성을 사악한 존재로 만든 무자비한 여성탄압 사건이었다. 성폭력사건이나 살해사건이 벌어지면 우선 피해여성이 사회적으로 보호받을만한 여성이었는가, 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기사와 시민들의 태도를 수없이 보아왔다. 희생된 여성들에게 ‘업소여성’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들의 죽음을 평가 절하하는 것 또한 현대판 마녀사냥과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의 문제

 

▲연쇄살인범에게 희생된 여성들의
넋을 위로하는 천도제가 지난 7월30일
서울 봉원사에서 열렸다
(출처-한겨례, 서울신문)
모든 스트레스와 분풀이는 약자에게로 흐른다. 제대로 반발하거나 대항하지 못할 것 같은 약한 존재인 장애여성은 가족 안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런 분풀이의 폭력을 당하기 쉬운 위치에 놓여 있다. 더군다나 자신의 삶의 주체성과 결정권을 지키기 위해 힘들게 독립을 준비하는 장애여성들에게 이런 사건은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가. 우리는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을 고민 없이 사용할 때 얼마나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이라크전쟁을 통해 배웠다. 명분 있는 전쟁이 없듯 명분 있는 살인도 없다. 이번 살인 사건은 한 남성의 왜곡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의 잘못된 통념이 든든하게 그를 지탱하고 있으므로 유영철 개인과 피해 입은 여성들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사건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 힘을 사용했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물리력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부여된 권력일 수도 있다. 세상은 그 둘 다 가지지 못한 여성들에게 죽어서까지 책임을 묻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유영철에 대한 처벌을 확실히 하고 치안에도 힘을 쏟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 재정립과 자기가 가진 힘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유이다.

글 박주희(장애여성공감 운영회원)

 

작성자박주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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