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3] 나의 지옥철 체험기
본문
“경험이라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기억 혹은 문제로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사생활이어서 남에게 내어놓기가 녹녹치 않다.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생기는 개인적인 경험들- 이를 겪어내는 수많은 개인의 눈물과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이 경험들은 당당히 드러내고 서로 뭉쳐야 사회적으로 해결할 문제로 등극된다”
이 글은 근이양증(근육 디스트로피)이라는 장애를 가진 한 개인의 경험이다. 지하철 편의시설의 변화에 따라 삶이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그는 담담하게, 그러나 뜨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겪어야만 했던 그의 경험들은 한 장애우의 삶의 기록이기 전에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우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글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시민네크워크가 주최한 ‘안전한 지하철 가꾸기 시민운동 토론회’에서 토론자로 발표한 이현준(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간사의 글을 요약발췌한 것임을 밝힙니다)
다시는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으리라
나는 지하철이 처음 개통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 개통. 그 날은 육영수 여사 사망일이어서 더욱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우리 집은 대방역 근처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개통식 구경하느라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 기억에도 아찔하게 하늘 위로 솟아 있는 대방역의 나무계단이 웅장하게 각인되어 있다.(그 계단 때문에 대방역은 최악의 전철역 중 하나였다.) 그 때쯤 서서히 장애가 진행이 되어 잘 걷지 못하게 되면서 한동안 지하철은 나와 무관한 존재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장애우 편의시설이 없는 지하철이 이동 약자들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지를 경험한,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사고를 당했다. 교내 사생대회 때문에 경복궁에 갔다가 친구들이 다 가버리는 바람에 나혼자 지하철로 귀가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걷기가 무척 힘들 정도로 장애가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 시도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아마도 경복궁역이었을 것이다.
아래로 끊임없이 이어진 계단을 거의 기다시피 내려왔다. 혼자 몸으로도 힘든데 양손에는 화구들을 들었고 초여름의 더위가 온 몸을 땀으로 젖게 만들었다. 내려오는 동안 다리는 풀리고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가까스로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인 대방역까지는 도착했는데, 내리려고 일어서는데 전동차가 갑자기 정차하는 바람에 그 반작용으로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그만 와르르 엎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전동차는 출발했고 결국 다음역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대방역에서 내렸다. 대방역의 까마득한 계단을 내려와 다시 2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집에 도착해서야 그 기나긴 악몽은 막을 내렸다. 다시는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누가 하루만이라도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한다면...
지하철에 가장 처음 도입된 장애우 편의시설은 이동식 리프트였다. 이기계는 8시간을 충전해야 겨우 30분을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단 한번 이 기계를 이용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마치 짐짝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머리가 거꾸로 아래쪽으로 처박힌채 거의30분을 덜컹대며 이동해야 했다.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아직도 이 시설이 과천선에 비치가 되어 있다. 이런 지하철을 한 번 이용하고 나면 자원활동가나 장애우 당사자나 다시는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게 된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지하철의 장애우편의시설은 다섯 손가락에 꼽기 어려울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1994년 4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녹색교통운동의‘지하철-전철 장애우 편의시설실태’통계에 따르면 휠체어 리프트는 3곳, 이동식 휠체어리프트를 갖춘 역은 17곳, 엘리베이터 경사로는 학여울 역 1곳으로 나타나 한심한 지하철의 실태를 보여주었다. 지하철의 장애우 편의시설이 본격적으로 확충된 것은 90년대 중후반 제2기 지하철 5∼8호선이 개통 때부터였다.
그렇지만 누가 하루만이라도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한다면 장애우 이동편의시설로 리프트가 채택된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연구소 내가 사는 효창동까지 지하철을 이용해 가려면 내방역에서 리프트 한 번, 이수역에서 한번, 삼각지역에서 한 번, 효창동역에서 세 번, 총 여섯 번의 리프트를 이용하게 된다. 만일 리프트가 내려가 있어서 올라오는 것까지 치면 열 두 번. 호출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한번에 15분 이상이 걸린다.
따라서 리프트 이용 시간만 이무리 적게 잡아도 한 시간 이상이다. 그것도 리프트가 망가지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데 리프트 여섯 번을 이용하는데 한 대도 망가지지 않고 정상 가동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겨울에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하철을 이용하면 가장 당황스러울 때는 리프트가 중간에서 멈출 때이다. 특히 공교롭게도 밤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 강추위가 몰아칠 때, 몸이 피곤할 때면 예외 없이 리프트 고장이 일어난다. 어떨 때는 집 앞에 다와서 추위에 떨며 몇 시간을 공중에 매달려 떨어야 한다. 리프트가 고장나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빨리 처치해주기는 원하지만, 역무원들은 기계를 만져보고 다른 사람을 데리러 왔다갔다가 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다. 격국은 시간이 흐를대로 흐른 다음에 전동휠체어를 들 생각을 한다. 내 휠체어는 무거워서 적어도 여섯 명은 달려들어야 겨우 들 수 있는데, 공익요원 역무원들이 다 달라 붙어봐야 다섯명 이상 모이기 힘들다. 역무원들은 그렇다고 시민들의 도움을 청할 생각도 못한다. 시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는다고 자신들만 욕먹는다고 한다.
나는 리프트가 중간에 멈추는 사고를 여러 번 당했는데 한 번은 들 것에 실려 내려가 찬 지하철 바닥에 십여분을 누워 있어야 했다. 지나가는 승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순간들이 너무도 황당했다. 어떤 때는 119 구급대가 출동해 전도휠체어를 들어올린 적도 있다.
이동권이 장애우의 삶을 규정한다
2000년 4월, 30대 중반이 된 나는 난생처음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되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 함께걸음 기자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30대 중반에서야 처음 경험하게 된 사회생활 때문에 이동권의 문제와 직면하게 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동권 문제는 지하철 7호선 개통으로 일거에 해결되었다. 훨체어 리프트를 갖춘 7호선 내방역이 새로 생긴 것이었다. (연구소는 내방역과 방내역 사이에 있다)게다가 환승 없이 다섯 정거장만 거치면 직장생활을 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이동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지하철 첫 개통으로부터 실로 26년이란 세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이동권과 관련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은 전동 휠체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당장 이동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휠체어에 태우고 이동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이동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2001년 4월부터 부서를 옮기면서 거의 전일 출근이 되어 정말 여러가지 특별한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수소문 끝에 동작자원봉사 은행으로부터 차량을 가진 자원활동자가 연결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불행이었다. 자원활동자는 50년대 중년 남자로 왜소하고 미숙한 편이어서 내심 불안했다. 승용차에 태우기 위해 그 분이 내 왼쪽 팔을 잡았는데 어정쩡하게 잡은 상태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어 그만 왼팔이 한바퀴 뒤로 완전히 돌아가며 팔뼈가 부러졌다. 이동문제로 궁지에 몰려 나름대로 자구책을 구한 후 첫 도움을 받는 순간 불상사를 당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직장을 가졌지만 이동의 문제는 항상 나를 괴롭혔다. 생각이 삶을 규정하는 것처럼 이동권이 장애우의 삶을 규정한다고 단언한다. 그동안의 장애우으로서 내 삶을 돌이켜보면 결국은 이동권의 변화에 따라 삶이 좌지우지 농락당했다는 느낌이다.
올해 1월부터 나는 39년만에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직장도 지하철을 이용해 매일 출퇴근한다. 다들 나에게 기적이라고 말한다. 남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도 집 밖도 나라 수 없었던 사람이 혼자서 매일 지하철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일컫는 말이지만, 이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장애우를 더욱 장애우로 만드는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봐야 한다. 아직도 나보다 더 장애가 경한 장애우들이 집 밖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와 사회가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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