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중증장애우 일상다반사 : 내가 살아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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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아홉시. 오늘도 전화기를 들고 다시 전화와의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아내도 다른 전화기를 들고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데 여념이 없다. 매일매일 이런 전쟁 아닌 전쟁을 해야 하다니...
전동휠체어를 타야하는 나로서는 언제나 이동이 문제다. 물론 버스는 탈 수 없고 주변 전철역에는 승강기도 없으니 장애인 콜택시가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콜택시는 이용이 쉽지 않고 시간도 맞출 수 없어 하루 전 예약이 가능한 장애인심부름센터를 주로 이용한다. 하지만 예약이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뚜뚜뚜..." 미친 사람처럼 손가락에 불이 나라고 누르고 눌러도 이 소리만이 수화기를 타고 들린다. 이렇게 20, 30 분, 겨우 겨우 통화가 되더라도 이미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차량 예약이 끝났다는 대답을 듣게 되면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며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또한 연결이 되어도 요금이 문제다. 일반 택시 요금보다야 싸지만 요즘 경제적으로 궁핍한 내 상태에서는 하루 몇 천원의 돈은 끔찍하게 부담스럽다. 이 사회는 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일하고 싶다는 사람을 왜 이토록 핍박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사실 장애인은 의욕을 가지지 않고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 속 편한 처세방법일 것이다. 얼마 전 벌이도 없는데 어머니 약값은 자꾸 나가 의료보호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동사무소를 방문했었다. 쓰러지셔서 3년째 식물인간처럼 사는 어머니와 다섯 달밖에 안된 딸과 함께 살아가야 하니 힘이 겨워서 조금이라도 정부 지원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한 마디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아파트가 있다는 것이었다. 주거라도 확실히 하기위해 형제 돈 끌어 모아 겨우겨우 몇 년 전 아파트 한 채를 샀더니 이 이유로 하나로 하루아침에 부유한 장애인이 되어버렸다.
아직은 자존심이 있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힘겹게 사는 중증장애인의 조그마한 부탁이라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쌀쌀함에 씁쓸하면서 동사무소 문을 나설 때 함께 갔던 사람이 옆에서 영세민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주는데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자기 일을 가지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었는데 세상을 참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신념에 잠깐 혼란스러웠지만 마흔이 넘어 갖게 된 내 딸 앞에서 내 인생의 신념은 다시금 제 자리를 잡는다. 힘들고 어렵다고 굴복하는 나약한 아버지는 결코 되지 말자.
딸은 올해 세상에 태어났다. 일찍 장가를 든 사람이면 이미 사위 볼 나이이건만 정말 뒤늦게 딸을 얻게 된 것이다. 딸은 정말 귀엽다. 방긋방긋 웃는 아가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 평화와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뒤늦게 얻은 행복을 즐기고 있을 수만 없으니 아내는 건강하지도 못한 내가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불안해하는 눈치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그 나이에 맞는 생애별 발달 과업이 있는 것인데 나는 너무 늦게 진도가 나가고 있는 것이다. 남이 이미 자녀 양육을 끝내가고 있을 쯤에 양육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지지부진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고 장애인으로 겪어야할 숙명인 것이다.
요즘은 안 그렇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중증장애인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많은 장애인들이 그래서 용감하게도 무학(無學)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내가 비로소 대학물을 마시게 된 때는 30대 후반. 참으로 이 사회는 나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다 늙어서 무슨 공부냐고 친한 친구는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뒤틀린 내 인생을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돌리고 싶어 남들이 이미 오래 전에 떠난 자리에 들어가고 있었다. 늦었다고 포기하기에는 억울하지 않는가.
대학 졸업과 취직, 그리고 결혼과 아이를 갖기. 내 인생은 이렇게 진행됐다. 생애 과업으로 봐서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순차적이다. 하지만 출발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 문제다. 남들보다 늦게 가는 인생, 물론 남들보다 오래 산다면 얼추 보통의 삶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게도 하겠지만 오래 살려면 건강해야 하는데...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동서고금을 통해 모든 사람의 욕망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시작하는 인생이니 이 욕망에 더욱더 집착한다. 건강하고 싶어 장애인 수영장을 몇 번 찾은 적이 있다. 수영을 제대로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물 속에서 충분히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수영장을 안 가고 있다. 우선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택시로 30분이 넘게 걸리는데 왕복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또한 교통비도 만만치 않아 이래저래 안 가고 있는 것이다. 운동이란 것이 매일 같이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큰 맘 먹고 찾아가야 하니 운동효과를 기대하기가 힘들 것만 같아 더 안 가게 되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에 의하면 서울에는 장애인 수영장등 체육시설이 네 개있고 이것으로 완전히 신설 계획은 끝났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중증장애인들에게 수영장 등 체육시설에 가는 것은 일년에 한 번 있는 정도의 행사가 될 테니 중증장애인에게 생활체육은 역시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애인들에게 이토록 운동의 기회를 봉쇄하면 건강이 나빠진 장애인의 엄청난 병원비를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건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달 전 서대문 보건소로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갔는데 예방주사 대상자는 65세 이상 노인이지 장애인은 아니라고 해서 크게 싸운 적이 있다. 보건소 담당자는 복지부 지침까지 보여주면서 아무리 장애가 심해도 65세 이상만 노약자라며 장애인은 예방주사를 놔줄 수 없다고 박박 우기는 것이었다. 동네 의원은 대개 2, 3층에 있어 휠체어 장애인은 갈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다면 이 나라 보건정책담당자들은 은근히 장애인들이 독감으로 혼쭐이 나거나 심지어는 죽기를 기대하는가 보다.
이토록 힘겨운 하루하루. 그러나 오늘도 살기 위해 다시 일어선다. 아무리 이승이 힘들어도 저승보다 나을 것이며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이 많은 것이 세상이다. 다만 내가 좋은 것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이런 희망을 갖고 나는 다시 전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얹는다.
글 윤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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