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차별에 언제까지 한탄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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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계가 제천 이희원 씨 사건으로 분노하고 있다. 속내는 다른 음모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유인 장애우여서 보건소장으로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장애우차별행위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사건은 장애우들에게 매우 심한 자괴감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폭거에 다름아닌 범죄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이번 사건이 흐지부지 제천시장의 사과 한 마디로 끝날 경우 장애우들의 상실감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이건 너무 심한 과장이 절대 아니다. 이번 사건의 특징은 장애우들을 향해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너는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안돼’ 라고 선을 긋는다면 이보다 더 야만적인 행위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제천시장은 공직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당연하다는 듯 이희원 씨에게 ‘너는 장애우니까 의무과장만 할 수 있어 보건소장은 절대 안돼.’ 라고 선을 그었다.
이렇게 제천시장이 그어댄 선은 비단 이희원 씨에게만 적용되는 선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제천 시장은 이 땅에 사는 장애우들에게 너희들이 밤잠 안 자고 노력해봤자 소용없어. 왜냐하면 너희들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야. 너희들은 언제까지나 동정의 대상으로 남아 있어야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장애우들은 이런 치욕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그 동안 장애우들은 지속적인 차별에 시달려왔다. 입학거부, 취업거부, 법관임용거부, 님비현상 등 장애우에 대한 차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다. 문제는, 불쑥불쑥 마각을 드러내는 차별에 장애우와 장애계가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장애우는 차별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그 이유를 한 번 따져보자.
언뜻 떠오르는 이유의 하나는 장애우들이 차별에 대응할 수 없는 약자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짓밟아도 대응을 제대로 못하는 철저한 약자가 장애우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강변할 수 있을 것인가.
또 하나 장애우가 차별에 시달리는 이유는 불행히도 우리 사회가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계층별 이익집단별로 뭉쳐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쟁취해낼 수 없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험한 세상을 살면서 장애우들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즉 장애우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해 나가지 못하고, 정부나 사회의 온정주의에 기대 삶을 이어가기 때문에 차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 예로 지금 주위를 둘러 보라. 과연 차별에 대응할 수 있는, 장애우와 장애계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뭐가 있나?
불쑥불쑥 이어지는 차별에 사후약방으로 대처한들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애우차별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장애우들이 자각하고 단결해서 강고한 이익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익집단이 돼서 이권과 자리에 한눈 팔지 말고,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 벌어졌을 경우 강력하게 대처해서 장애우를 차별한 그 대상이 누구든 큰 망신을 당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사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제천 이희원 씨 사건은 장애우에게 큰 고민을 안겨주는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장애우들은 언제까지 장애우로 태어난 것을 불행으로 여기며 한탄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그런 다음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 것인지 의타적인 인간으로 살 것인지를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만약 이번 제천 사건을 어물쩍 넘겨버리면 틀림없이 이번 사건은 나중에 더 큰 부메랑이 되어 장애우들 가슴에 아픔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 아픔이 두렵다면 지금은 방에서 나와 행동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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