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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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15일 독일의 구 동베를린 지역에 있는 프리드리히 스펠데의 한 묘지에는 전세계 수십만 명의 참배객들이 몰려들었다. 눈에 덮인 5평 정도의 묘지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수천 송이의 카네이션으로 붉게 덮였다. 로자 룩셈부르크 서거 80주년. 독일 공산당의 어머니,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불린 로자 룩셈부르크는 격변의 시대에서 진정으로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혁명가였다. 150cm의 작은 키에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갖고 있던 그녀는 연약한 여인이었지만 레닌과 함께 20세기초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였다. 그녀는 마르크스를 신봉했지만 그를 뛰어넘는 뛰어난 지식인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서거 80주년을 맞이해 독일에서 활발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졌고 전기출간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다.
어려서부터 눈뜬 저항정신과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
로자 룩셈부르크 관련 서적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니고만 있어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만큼 불온서적이었다. 과격한 극좌 공산주의자로만 알려져 있던 그녀에 대해 최근 국내에서도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그녀는 마르크스를 뛰어넘을 뿐아니라 여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와는 틀리다는 것이 근래의 시각이다. 로자는 평소에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과묵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남매들이 제공한 자료에 의존해 추정해 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1919)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으로서 1871년 러시아 지배하 폴란드 자모스츠 중류층 유대인 가문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는 다섯 살 때 골반 관절염에 걸려 1년 내내 침대에 누워지냈다. 그런데, 골수의 결핵으로 잘못 알고 치료를 하는 바람에 회복이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다. 이후 다리를 절게 되었고 좌골통증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대체로 어린 시절은 때때로 궁핍했지만 행복했다. 자모스츠 지역은 가난에 찌들었고 특히 유태인은 최하층 중의 최하층으로 외세 러시아하에서 억압을 당했으며 빈곤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유태주의의 희생양들이었다. 다행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목재상을 하면서 재산을 모은 덕에 상류사회와 접촉이 가능했고 독일까지도 여행할 수 있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근대적 교육을 시켰다. 로자의 아버지는 자유주의 사상을 배웠고, 세계사와 서유럽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공공의 복지를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가풍에서 자란 그녀는 총명하고 적극적이어서 어려서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보통 유대 여성보다 교양과 문화적 관심이 훨씬 높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재능이 발현되었다. 이미 다섯 살 때부터 읽기와 쓰기가 가능해 손위 형제에게 편지 쓰는 일을 즐겼고 최초의 작픔을 어린이 잡지에 보내기도 했다. 집안 어른들은 이 어린 신동을 남들에게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 살 때 로자 집안은 바르샤바로 이주했다. 바르샤바 김나지움에서 공부를 한 로자는 16세 때부터 혁명 활동에 참가했다. 당시의 폴란드 학제는 억압적이어서 학생들은 폴란드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교사들은 밀고자 역할을 했다. 이는 학생들로부터 저항의식을 키우게 했고 격렬한 데모를 불렀다. 집안의 자유주의 정신, 민족정신, 절대주의에 대한 증오는 그녀를 투쟁의 중심으로 몰아넣었다. 어린 나이부터 저항정신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싹튼 그녀에게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키비츠였다. 특히 그의 애국심과 망명생활은 깊은 감화를 주었다. 고등학교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는 이런 저항 활동 때문에 졸업 때 마땅히 받아야 할 금메달을 받지 못했다.
거듭되는 체포, 사회주의 이론 개발, 저술, 투쟁활동 그리고 죽음
체포에 위기에 직면한 로자는 1889년 스위스의 취리히로 건너갔다. 취리히는 제정 러시아에 대해 급진적이었던 많은 혁명가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취리히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이때부터 저널리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폴란드 왕조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898년에는 폴란드의 산업개발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898년 독일 시민권을 얻기 위해 구스타프 루벡과 결혼한 후 베를린에 정착하며 그녀는 1898년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의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제2인터내셔널에 참여했다. 거의 곧바로, 그녀는 당을 분열하게 했던 수정주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1898년 독일 수정론자 에두아드 번스타인은 마르크시즘이 본질적으로 시대에 뒤쳐졌고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주의국가는 노동조합운동과 의회의 정책을 활용한 점진주의적 접근을 통해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이에 대하여 개혁 또는 혁명 1889년에 부르조아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시즘의 신봉과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이론가 칼 카우츠키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결과 수정주의는 비록 계속 진보되었지만 독일과 국외에서 이단이 되었다.
로자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 러시아 혁명은 그녀의 삶에 있어 중추적인 체험이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독일이 세계 혁명이 시작될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라고 믿었다. 이제 그것이 러시아에서 불붙을 것이라고 믿었다. 바르샤바에 가서 투쟁에 참여하고 1906년 체포되었지만 건강상의 사유로 결국 풀려나게 된다. 로자의 중요 이론인 대중혁명운동 이론은 이들 경험으로부터 나타났다. 그녀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달성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집단파업을 지지했다. 객관적인 상황에서 자발적인 결과인 집단파업은 노동자를 개혁하고 혁명을 앞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레닌에 비하면 그녀는 튼튼한 당조직에 대한 필요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직은 투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때문에 로자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그녀는 독일로 돌아와 사민당 학교에서 1912년까지 강의를 했고 정치적 무기로서 대중파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했다. 이는 1912의 중요 이론적 저술인 자본의 축적에 나타났다. 거기에서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이고 경제적인 좌초로 반드시 붕괴할 것이란 것을 입증하려 노력했다.
독일 사민당 내 좌파지식인이던 그녀가 꿈꿨던 것은 지식인과 노동자가 참여하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몸담고 있던 사민당이 제국주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을 승인하고 노조운동을 탄압하며 독일제국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자 사민당을 탈퇴하고 즉시 항거에 들어갔다. 1917년 카를 리브크네히트와 함께 사회혁명을 열망하는 노동자와 퇴역군인, 지식인을 모아 극좌단체인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결성했다. 2년 후에 이 조직은 독일 공산당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로자는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거기에서 그녀는 세계혁명의 선구자로서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을 맞이했다. 석방되면서 로자와 리브크네히트는 새로운 좌익을 촉구하기 위해 즉시 선동활동에 들어갔다. 볼셰비키처럼 룩셈부르크와 리브크네히트는 노동자와 군인 평의회를 위한 정권을 요구했지만 보수적인 사회주의 체제와 군에 실망했다. 1918년 12월말 그들은 독일공산당을 창설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이 새 조직에서 볼셰비키 영향을 제한하려고 했다. 사실 그녀는 1922년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 일당의 토지균분과 민족자결주의 입장, 그리고 독재주의와 테러주의 방법에 대해 비난했다. 그녀는 항상 레닌의 민주중앙집권제에 대한 반대로서 민주주의 신봉자로서 남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신당에 대한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리브크네히트와 함께 1919년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베를린에서 봉기하여 정부에 투쟁하자 로자는 혁명에 참여했고 리브크네히트와 함께 1919년에 체포된다. 감옥으로 호송되는 중에 그녀와 리브크네히트는 1919년 1월 15일에서 16일 사이에 독일 의용군에 의해 란트비르 운하에 던져져 5월에 발견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연인 레오 요기헤스는 1919년에 살해됐다. 그는 죽음 바로 직전에 클라라 제트킨과 마틸드 야콥과 로자가 간직하고 있던 저술들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그 프로젝트는 천천히 진행됐는데 레닌의 룩셈부르크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때문에 쉽게 이행 될 수 없었다. 그녀의 유작들은 1970-75년에 이르러서야 독일민주공화국 동독에서 발간되지 못했다.
1970년대부터 독일에서는 룩셈부르크의 업적을 절대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론은 공산주의냐 사회민주의냐를 양자택일하는 것만큼 존중되고 있다. 마르크시즘의 연구의 흡인력이 1980년대 들어 소멸되기 시작하자 페미니즘 이론가들 사이에서 조용히 로자 룩셈부르크가 떠올랐다. 룩셈부르크 자신은 여성 인권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로자에게 여성해방은 자본주의의 압제로부터의 자유의 한 부분을 위한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생은 1986년 마르가레타 폰 트로타 감독에 의해 영화 로자 룩셈부르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이상 못다 피운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모든 압제에서의 진정한 인간해방에 대한 염원은 여전히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것이다.
글/ 이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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