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안토니오 그람시 > 대학생 기자단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 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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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1891년~1937년), 로자 룩셈부르크(1월호 장애우 이야기에 소개)와 많이 닮아있다. 두 사람 모두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받고 있고 각각 이탈리아와 폴란드에서 공산당을 창설했으며 세상의 모순을 사회주의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신념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인물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장애우였으며 단구의 병약한 몸으로 압제와 모순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어려운 시대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는 우리 장애우들도 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수도 없이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그람시와 룩셈부르크의 이루어지지 않은 꿈처럼.

 생기발랄하고 쾌활했던 유년시절, 고뇌에 찬 청년기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알레스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7형제 중 넷째였다. 어머니는 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지방 토지세 사정관이었다. 그 당시 사르디니아는 가난에 찌든 소작농 사회였지만 그람시의 집안은 비교적 특권을 가진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누렸던 어린 시절의 추억일 뿐이다.

그람시는 네 살 때 불의의 사고로 척추 만곡을 갖게 된다. 어느날 집안의 고용인이 그람시를 실수로 떨어뜨렸고 그 바람에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때부터 척추장애를 갖게 되었고 평생을 5척 단구로 살아야 했다. 그는 장애 때문에 한 소작농 놀이 친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 친구는 귀족 프랑세스코의 아들로서 특권을 누렸던 그람시에 대해 평소에 미신과도 같은 적개심을 갖고 있었고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그람시를 신체적으로 괴롭히고 배척했다. 그람시는 어린 시절 늘 병약했고 성장한 뒤에도 갖은 병마로부터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가 스물 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하시라도 그를 묻을 수 있도록 조그만 관과 흰옷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람시는 6세까지만 해도 생기발랄한 상상력과 자연스럽고 쾌활한 기질, 그리고 강한 의지를 가진 소년이었다. 그러나 마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곧 내향적이고 진지하고 신경이 예민한 성격이 형성되어 언제나 홀로 있기를 좋아했고 금욕주의자가 되어갔다. 그는 일찌기 남의 도움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마음과 신체 그리고 감정에 엄격한 통제를 단련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람시는 행복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전기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존 카메트는 "어린 시절 그는 증오를 느꼈고 따돌림을 당하고 굴욕을 당했다"고 술회했다. 그를 아는 가족과 친구들은 어린 시절의 그를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격 형성은 6세 때 아버지가 횡령 무고로 투옥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의 퇴락 이후 학창시절과 초기 성인기에 그람시는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어야 했다. 쓰다 버린 기름초 토막을 주워 모아 초를 만들어 다시 쓸 만큼 극심한 가난이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일곱 자녀를 길러야 했고 그람시는 오랜 동안 학업을 중단한 채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해야 했다.

어린 그람시는 사회적인 고립과 불운, 그리고 감정적인 에너지를 지적인 추구에 집요하게 쏟아부음으로서 보상받으려 했다. 어린 나이부터 그는 모든 종류의 소설을 탐욕스럽게 읽었다.

그람시가 처음으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대 중반 이후였다. 7살 위인 사회주의 운동 동지인 제나로로부터 사회주의 이념과 사르디니아인 노동자 계급 투쟁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사르디니아의 수도 카그리아리에서 노동자 투쟁 활동을 했던 제나로는 그람시가 14세 때 이탈리아 사회주의당 기관지인 "아방티"을 정기구독시켰다.

1908년 그람시는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제나로와 동거했다. 19세 때쯤 그람시의 사회주의는 반식민적 연민으로 정해졌다. 고등학교 시절인 1910년 8월 쓰여진 압제와 압제자라는 제목의 에세이는 한 사람, 한 계급 혹은 심지어 전체 사람들의 전제정치에 대해 인종의 끊임없는 투쟁에 대한 칭송으로 쓰여졌다. 그의 젊은 필력은 이미 대단히 강렬하고, 고집스럽고 낭만적이고 아직 개성이 제약된 지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 위해 학자의 길을 포기하다

 1911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토리노 대학에 입학했다. 1911년에서 1912년 사이 그람시는 전임 대학 연구생이었다. 그는 문헌학 연구에 뛰어났고 언어학 대학교수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1913년 말 6월 혹은 7월에는 FGS (사회당청년동맹)의 회원이 되었고 1914년에는 사회당에 가입했다. 그는 대학에서 발표했던 급진적인 이론들을 실제적 정치적인 행동으로 돌리고 싶어 점점 더 조바심했다. 결국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중퇴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1914년부터 1918년.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연구했고 이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사회당 내에서 좌파그룹을 형성했고 신문 르오르딘 누오보 (새로운 명령)을 창간했다. 그의 그룹은 토리노에서 무의미한 대중 파업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람시는 니보르노 1921년 1월 사회주의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설하기 위해 좌익파업을 이끌었다. 1921년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립하고 코민테른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1922년 5월 당은 그의 안전을 두려워하고 약해진 건강에 대해 걱정하면서 그람시를 소련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람시는 1924년 5월경까지 소련과 비엔나에서 거주하며 정치적으로 일했다.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신경계의 완전한 쇠약으로 고통당했고 모스크바 변두리 요양소에서 여섯 달을 보냈다 여기서 레닌의 가까운 개인적인 친구인 저명한 공산주의자의 딸인 장래의 아내 귈리아 슈흐트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그람시는 이 때를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한때로 기록했다.

1924년 4월 귀국했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당은 무솔리니 등 파스시스트들에 의해 불법단체가 되었고 그람시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26년)

1927년 6월 22일 그람시는 옥중에서 의료 검진을 받았는데 요독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장애우를 위한 특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28년 6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공산당 지도자들을 재판했다. 그람시는 다른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20년 4개월 형을 받았다. 이미 그때 그는 병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파시스트들에게 경계 대상 1호였다. 법정에서 한 검사는 그를 일컬어 "20년간 저 사람의 두뇌를 활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1933년 11월경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 연안 바닷가에 위치한 감옥으로 옮겨 주었다. 1937년 4월 27일 이른 아침 네 시 그람시는 심각한 뇌출혈로 사망했다. 46세였다. 그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고 출생지 사르디니아의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

그람시의 인생역정, 정치적 체험, 정치 이론은 그가 옥중에서 기록한 ‘옥중수고’에 집약되어 있다.

거의 3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노트에는 이탈리아의 역사, 정치, 문학과 문화, 파시즘, 카톨릭 교회, 마르크시즘, 철학, 교육이론, 크로체, 마키아벨리와 지성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그는 감옥에 갇히기 전 10년간 강렬한 활동기(1917-1926)를 보냈다.

그 10년은 혁명의 기술에서 아직은 젊고 미숙했다. 그와 이탈리아 노동계급에게는 비극적이게도 그의 완전한 정치적 성숙은 감옥에 들어가서야 이루어졌다.

그람시는 감옥을 단지 혁명 투쟁의 다른 영토로 보았다. 그는 감옥에서 혁명계획을 공식화했다. ‘옥중수고’는 집요하고 찬란하게 그 계획을 따라 사망할 때까지 쓰여졌다.

‘옥중수고’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러시아인 처형인 타니아의 덕이었다. 타니아는 ‘옥중수고’를 형무소 병원에서 밀반출했고 소련으로 보냈다.

거의 1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타니아의 정치적, 개인적 그리고 감정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세계는 20세기의 위대한 문학 걸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을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발전시킨 많은 시각들과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이론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자본주의 혼돈과 격렬한 신파스시즘적 신식민적 세계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와 공명하고 있다.

그람시의 이론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헤게모니 이론이다. 흔히 주도권다툼으로 해석되는 이 이론은 무심코 또는 정확한 의미 규명 없이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헤게모니는 한 계급이 단지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종속집단인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 또는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헤게모니를 형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헤게모니는 기존의 부르주아 헤게모니보다 더 거대한 동의 기반을 가질 것이며, 더 많은 집단의 기대와 이해에 부응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헤게모니, 즉 프롤레타리아적 헤게모니는 오직 지배적인 헤게모니와의 대립관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은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비난받고 있기도 하지만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공산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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