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작은 성악가 > 대학생 기자단


세상에서 제일 작은 성악가

크바스토프가 쏘아올린 작은 공

본문

 

▲토마스크바스토프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겨울나그네’는 특별한 감동을 준다.

‘겨울나그네’를 떠올리면 헤르만 프라이, 프리츠 분덜리히, 페터 쉬라이어, 피셔 디스카우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악가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간다. 이들 모두 당대 최고의 리트(독일 가곡) 가수였고 여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의 ‘겨울나그네’는 하나같이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지만 크바스토프에게서는 각별히 인간사의 고뇌에서 초탈해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빛소리 앙상블을 결성해 장애인 시설에서 자주 문화 공연을 펼치고 있는 음악 평론가 우광혁 씨는 한 잡지의 기고에서 “음악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기법 중에는 빠르기의 변화와 강약의 변화가 있는데, 이 대비의 테크닉은 ‘아닌 척하면서 넌지시 보여주는 맛’이 있어야 제격이다.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탈리도마이드 장애,
작은 체구로 인한 성량의 한계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정복

  크바스토프의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바바리코트를 걸친 중후한 멋진 중년신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듣는 이가 여성이라면 눈을 감고 그런 멋진 남성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가 무대로 걸어나올 때, 그리고 무대에 자리를 잡고 다른 연주자들과 같이 섰을 때 청중들은 4피트의 조그맣고 양팔이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그러나 그가 노래하기 시작하면 청중들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오던 가치기준은 엉뚱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크바스토프는 목소리가 중후하고 멋진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일 수밖에 없다.

크바스토프가 태어날 즈음인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탈리도마이드라는 진통제의 부작용이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탈리도마이드는 진통효과가 뛰어나 널리 쓰여졌지만 이를 복용한 임산부들은 예외 없이 팔과 다리가 없는 아이를 낳았다. 심지어는 신생아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산모가 아이를 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크바스토프의 어머니도 당시 수천 명의 독일 여성들처럼 임신 중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했고 그는 탈리도마이드의 전형적인 피해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장애는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장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편견 때문이었다.
무수히 많은 탈리도마이드 아이들의 발생에 직면해 독일의 학교 관계자들은 그들의 교육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갖고 있지 못했다. 크바스토프는 뇌성마비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에 보내졌다. 하지만 이것은 당국의 실수였다. 차츰 그가 정규교육의 자극을 받을 필요성이 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크바스토프는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풍부한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어머니 브리기트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그는 명랑한 천성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가족들이 그런 면에 당황할 정도였다. 어린 토미는 매일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는 방법을 가족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토미 너는 할 수 있어. 원하는 것을 해라’ 가족들은 반복적으로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고 실제로 그는 해낼 수 있었다.
크바스토프의 소망은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음악을 배우기를 갈망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편견으로 가득 찬 독일의 명문 콘서바토리(음악학교)들은 저마다 면접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입학을 거부했고, 이러한 완강한 규칙 때문에 일단 꿈을 접어야 했다.

결국 그는 피아노를 배울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기본적인 음을 골라낼 수 있다) “그것은 법적으로는 옳았다. 나는 그것에 대해 양보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그것은 실로 큰 문제점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결국 나중에 거부를 당했던 콘서바토리로부터 임시 교사로 초빙받았고 그는 응낙했다.

크바스토프의 입학이 거부되자 부모는 하노버의 콘서트 가수 샤롯테 레만에게 개인 교육을 맡겼다.
이것을 인연으로 크바스토프는 총 17년 동안 레만에게 배웠다. 레만은 그가 기교적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일 것이란 것을 확신했다.
 

지구를 들어올린 세상에서 제일 작은 성악가 

1988년은 음악적으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 해였다. 그는 그해 명성있는 뮌헨 ARD 음악 경연에서 청중들을 압도하며 우승했다. 그런데 이후 6년 동안은 직장(하노버 대중 라디오 아나운서 같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확신은 매우 천천히 다가왔다. 이 때 그는 장애가 경력에 영향을 끼칠 것이란 생각 때문에 조바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체격과 감소된 폐활량에 적응시키기 위한 목소리를 개발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다른 성악가들에 비해 체구가 작은 그는 머리와 성대에서 목소리를 낸다. 폐활량이 적은 그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미려한 목소리를 내는 비결은 바로 두성(頭聲)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뛰어난 해석력으로 모스크바 쇼스타코비치 음악상, 에딘버러 국제 음악페스티벌 음악상, 파리 성악 음반 아카데미 최우수상 등 하나 받기도 힘든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거듭 수상해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성악가의 대열에  올라섰다

크바스토프는 연주뿐 아니라 교사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특별 마스터 클래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1996년에는 데트몰트의 음악아카데미 성악부 교수가 되었다. 그는 종종 학생들이 강의를 반복해서 수강하기 위해 되돌아 올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엄격하지만 봉사심이 투철한 교수이다.

어느 날 한창 성장중인 젊은 바리톤 성악도가 로버트 슈만의 거의 잊혀진 레퀴엠의 아리아를 들고 왔다. 음량이 갑자기 상승되고 증대되는 멜로디 라인이 있는 미묘한 한 부분에서 크바스토프는 미세한 교정을 해 주기 위해 그의 노래를 중지시켰다. 그런데 그는 아랑곳없이 다시 시도했다. 크바스토프는 즉각적으로 그를 정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시도했고 크바스토프는 다시 그를 멈추게 했다. 그러자 제자는 화내는 태도로 말했다. “저는 이제 처음으로 그것에 익숙하려 하고 있습니다.” 크바스토프는 자신을 경시하는 그의 태도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책상 모서리를 양손으로 탕하고 내리치며 몹시 화를 냈다. “그것에 능숙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결국 그는 크바스토프의 조언을 따라 간신히 해냈고 곧바로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려 했다. 그때 크바스토프는 급작스럽게 그의 곁으로 달려가더니 그를 덥석 안아 주었다. 그런데, 키가 작은 그가 안은 것은 제자의 다리였다.

베이스 바리톤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이제 동세대의 가장 뛰어난 성악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매년 시즌 세계 유수의 주도적 오케스트라들로부터 초청받아 협연하고 있고 클라우디오 아바도, 콜린 데이비스 경, 세이지 오자와, 사이먼 래틀 경, 므스티슬라브로스트로포비치,  헬무트 릴링 같은 명성높은 유명지휘자들과 작업했다.

단지 그에게는 한 가지 숙제가 있었다. 성악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오페라의 주역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크바스토프는 베를린의 독일 주립 오페라단이 개최한 ‘리골레토’ 주역을 선발하기 위한 오디션에 참가했었다. 당시 음악감독이었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만투바 공작의 궁중 광대역인 장애를 가진 난쟁이역을 제안했다.(다니엘 바렌보임의 아내였던 전설적인 첼리스트 쟈크린느 뒤플레도 장애우였다.) 불쾌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크바스토프는 처음부터 그 배역에 대해 옳지 않다고 명백히 의사를 표명했다. 자신은 아직 젊은 음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배역은 명백하게 어둡고 나이든 음성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일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가 오페라 공연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이 크바스토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이 가능하다면 단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대가 될 것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지난 5월 끝난 슈타츠카펠레 베를린과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녹음 작업을 통해, 특히 수작으로 꼽히는 9번 ‘합창’에 크바스토프를 끌어들였다.
이는 그에 대한 배려차원이 아니라 그를 최정상의 성악가로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최근의 크바스토프의 활약은 필설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하다. 1999년 초 그는 파리, 비엔나, 잘즈부르크, 뮌헨, 일본과 뉴욕 투어에서 슈베르트 ‘겨울나그네’를 공연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을 비롯해 1999/2000 시즌에는 보스톤 심포니 세이지 오자와와 협연으로 카아네기 홀에서 데뷔했고 유럽에서는 비엔나 필하모닉 사이먼 래틀 경과 베토벤 합창 교향곡, 런던 필하모닉 쿠르트 마주어와 브람스 레퀴엠을 공연했고 비엔나, 런던, 베를린, 암스테르담 성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특히 BMG, EMI-Electrola, 필립스, 도이치 그라마폰과 기타 여러 레이블 등 세계적인 레이블과의 잇단 음반계약은 인상적인 대목이다. 그의 이런 활약상은 타임, 피플, 에스콰이어 등 세계적인 잡지에서 앞다투어 다뤄지고 있다.
이처럼 화려한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그이지만 일상으로 돌아 오면 외로이 혼자 살면서 종종 홀로 여행하기도 하는 개구장이 같은 유머 감각을 지닌 평범한 남자로 돌아온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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