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최고의 대통령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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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1999년 9월 16일 NBC 방송과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들은 20세기 최고의 대통령으로 당과 이념을 초월해 프랭클린 엘레노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선정했다. 이와 함께 미국이 이룩한 최대의 업적으로 2차대전의 승리가 선정되어 2차 대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그의 이름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처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에게는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장애를 철저히 숨겨 장애를 수치로 여긴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고 있기도 하다.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생애를 살펴본다.
갑작스럽게 닥친 소아마비로 정치가의 꿈 좌절
루스벨트는 1882년 미국 뉴욕 하이드파크에서 제임스 델러노 루스벨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청빈한 생활을 중시하고 기품이 있는 평온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은 주로 가정교사들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14세 때 매사추세츠 주 그라튼 학교 입학했다. 그라튼 학교로부터 그는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기독교 정신으로 헌신하는 교육을 받았다.
1900년 루스벨트는 하버드 대학에 진학한다. 이때 루스벨트는 자유방임적 정통자본주의에 일정 정도 국가가 개입해 규제하는 수정자본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훗날 뉴딜의 바탕이 된다. 한편으로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진보적인 정치를 펴는 모습에 매료되어 정치가의 꿈을 키웠다.
루스벨트는 1905년 3월 17일 뉴욕 시에서 인보문제(隣保問題)를 담당하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다. 엘리너는 미국의 역대 퍼스트 레이디 중 가장 호감이 가는 여성으로 꼽히지만 11세 때 고아가 되는 뼈저린 아픔을 겪었고 한 끼의 식사를 얻기 위해 중노동을 체험했던 성장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체험은 젊은 루스벨트로 하여금 비참한 슬럼가의 환경에 관심을 갖도록 영향력을 끼쳤다.
루스벨트는 컬럼비아대학 법과대학으로 적을 옮기고 법률시험을 통과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몇 년간은 월가(街)의 카터레디어드밀번사(社)의 변호인 상담역에 만족하며 보냈다. 1910년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권고로 정치에 입문해 뉴욕 주상원의원에 당선되었던 1913년에는 해군차관보를 역임했다. 이어 1920년 대통령후보인 제임스 M. 콕스와 국제연맹 가입을 내세우며 출마했지만 공화당 하딩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패했다.
이후 루스벨트는 매릴랜드에서 신용예금회사를 설립해 부회장이 되었고 다른 몇 개의 비즈니스 벤처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21년 8월 10일 그에게 운명의 순간이 닥쳤다. 캐나다의 뉴브런스윅의 캠포 벨로 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그는 물에 빠진 탓에 감기에 걸렸다. 그날 저녁 병세가 심해져 일찍 침실에 들었으나 불과 3일 만에 흉부 아래 전신이 마비되었다. 척수성 소아마비였다. 다행이 상체 근육은 곧바로 회복했지만 허리 아래로 마비가 남았다. 모친은 그에게 은퇴를 하고 하이드파크로 돌아올 것을 강력히 권유했지만 아내는 루스벨트에게 정치적인 의욕이 남아있을 것으로 굳게 믿었고 언제가 주어질 역할을 위해 기필코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한동안 좌절의 나날을 보냈지만 아내의 독려로 다시 걷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갖고 이후 7년간을 재활에 보냈다.
화려한 재기,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에 업적
이런 고투 끝에 소아마비로 잃은 건강을 회복했으나 정치 활동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 루스벨트는 민주당 진영에서 루스벨트의 이름을 유지시키기 위해 나섰다. 그녀는 소극적이었지만 곧 영향력 있는 대중 연설가로 변신했고 빈틈없는 정치 분석가로 성장했다. 뉴욕 주 도처에서 연설 예약이 이어졌고 그 결과 루즈벨트는 정치적 생명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정치 무대에 재등장할 기회를 기다렸다.
1924년 그는 뉴욕주지사 알프레드 E. 스미드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어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해 재기에 성공한다. 1930년 뉴욕주지사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된 후 불황 극복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결과 33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32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루스벨트가 취임하던 1933년은 대공황의 암세포가 극심하게 퍼져 있던 시기였다. 1929년 10월 24일 월가의 뉴욕 주식시장 주가 대폭락으로부터 3년 동안 5천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기업과 공장들이 연쇄 도산했다. 32년까지 국민총생산(GNP)은 29년 대비 56%로 떨어졌고 전 근로자의 약 30%에 해당하는 1천5백만 명 이상이 실업자가 되었다. 대도시는 실업률이 50%에 이르렀다.
루스벨트는 취임 직후부터 적극적인 정부개입 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루스벨트는 취임 1주일 후인 32년 3월 12일 일요일, 그 유명한 노변정담(라디오연설)을 통해 6천만 국민에게 저축을 하는 것이 유리하며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간절한 호소를 했다. 연설 다음날 국민들은 감춰뒀던 현금을 들고 은행문 앞에 줄지어 섰다. 이렇게 해서 은행위기는 해소됐다.
루스벨트가 경제공황의 타개책으로 내놓은 뉴딜 정책의 핵심은 고용창출이었다. 유명한 테네시계곡개발공사(TVA) 설립으로 댐, 발전소 등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민간자원보존단(CCC)은 빈민 청소년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대책으로 33년부터 10년간 250만 명의 젊은이가 도로 건설·홍수 통제·화재 진압 등에 투입되었다. 또한 공공사업청(PWA)을 설치하여 연간 4백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뉴딜 제 3기에 접어들며 높은 인플레를 막기 위한 긴축예산을 편성한 결과 경기가 급전 직하 다시 공황이 발생했다. 미국은 또 다시 닥친 위기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한 전시경제체제로 벗어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2차대전 중 실질소득이 거의 2배로 증가했다. 루스벨트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2차 대전을 승전으로 이끌었지만 1945년경, 20년 이상 괴롭혔던 소아마비 후유증을 포함한 건강의 악화로 얄타회담에서는 휠체어에 앉은 채 억지로 대회사를 낭독해야만 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1945년 조지아주에서 휴가 중 전신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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