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대] 흑묘백묘론
본문
중국 지도자였던 등소평의 어록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이 "흑묘백묘"론 입니다. 말 그대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이 말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만 잘 살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이 실용주의 노선으로 중국이 발전을 이뤘고, 등소평 사후에도 실용주의가 중국 국가정책의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난데없이 이 시점에서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을 들먹이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 장애계에도 실용주의적 관점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현안인 직업재활법 제정 문제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장애우에게 이익이 되는 게 뭔지 냉정하게 따져보고, 결론이 나오면 이제는 침묵하지 말고 직업재활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직업재활법 제정이 장애우에게 이익이 되니까 명분과 원칙을 무시하고 무조건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우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장애우운동의 대원칙이며. 따라서 직업재활법이 이 원칙에 어긋나는 법이라면 직업재활법을 제정하라고 목소리를 높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직업재활법은 장애우들의 지탄을 받고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직업재활법이 장애우 운동의 목표인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에 어긋나는 악법이라는 혐의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중증장애우를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장애에게 고용을 포함해 어떤 식으로든 직업을 갖게 해서 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하자는 직업재활법의 정신은 장애우운동의 목표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열악한 이 땅의 장애우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직업재활법 제정은 난산을 거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직업재활법 제정을 반대하는 일부에서 내세우는 주장 중 가장 큰 쟁점은 부처이관 문제입니다. 직업재활법 제정으로 직업 담당 부처가 노동부에서 복지부로 바뀌면 장애우 고용이 노동이 아니라 복지 차원에서 이뤄져서 장애우들이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직업재활법 제정에 있어서 이 문제 외에 다른 큰 쟁점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점만을 다로 떼어놓고 보면 너무 지나친 염려와 원칙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냐면 복지부가 직업 문제를 관장하게 되면 장애우 직업정책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어디가지나 "가능성"을 논하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노동부가 맡아 그 동안 추진해온 장애우 직업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은 통계상으로 그리고 장애우의 체감으로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제도와 정책을 바꾸지 않고 미래에 가시화될 지 알 수 없는 가능성만을 기지고 미리 염려해서 직업재활법 제정에 반대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막말로 얘기해서 노동부면 어떻고 복지부면 어떻습니까. 모든 장애우가 어떻게든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소득보장을 통해 사회참여만 가능하다면 어느 부처가 직업 문제를 맡건 상관없다는 게 대다수 장애우들 심정일 것입니다. 단 문제는 어느 부처가 직업 문제를 맡는 게 현 상황에서 더 효율적이냐는 것인데, 염려되는 것은 만약 노동부가 직업재활법 시행 부처가 될 경우 지금보다 더 많은 예산을 장애우들이 직업을 갖게 해주는 부문이 아닌 시설 건립과 새로 채용해야 하는 직원 인건비 등의 경상비로 지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지부는 전달체계를 갖추고 있고 전국에 있는 장애우복지관 등 기존 시설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별도로 시설을 건립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직원을 추가 채용하지 않더라도 당장 직업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지부가 직업재활법 주관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쟁점인 중증장애우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업재활법 제정을 반대하는 일부의 주장은 중증장애우 문제는 복지부에서 장애우복지 예산을 대폭 늘려 복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지금 우리 나라 현실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대단히 낮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복지부가 예산을 대폭 증액해 중증장애우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려면 긴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데, 현재 중증장애우들은 더 이상의 기다림이 가능하지 않은 매우 열악한 현실에 놓여져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큰 문제는 이런 주장은 그야말로 장애우 운동의 원칙에 어긋나는 위험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중증장애우들을 노동시장에서 소외시킨 채 시혜의 대상으로만 규정한다면 완전한 참여와 평등이라는 장애우운동의 원칙은 현실에서 실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의 예를 들어 안됐지만 장애우 운동이 활발한 선진국에서는 중증장애우라도 어떻게든 직종을 개발해 직업을 갖게 하고 대신 장애우에 대한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모든 장애우의 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이런 흐름에 역행하면서까지 굳이 경증장애우와 중증장애우를 따로 분리해 경증장애우는 고용이 가능한 대상, 중증장애우는 시혜적인 복지 조치가 필요한 대상으로 구분지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얘기지만 현대를 글러벌 시대라고 말합니다. 국경이 없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그만큼 우리는 경쟁이 치열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승자만 살아남는 냉혹한 시대를 살면서 국가 잉여로 장애우들을 먹여 살리는 게 언제까지 가능한지를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장애우들이 경쟁에서 도태돼 사회의 짐으로 남는다면, 장애우들은 동정의 대상이라는 불명예를 끝내 벗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애우들도 어떻게든 경쟁력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장애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싫어도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직업을 가져야 하고,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장애우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라는 간단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 고용촉진 법으로는 대다수 장애우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발상의 새로운 법과 제도가 필요한데, 노동시장에서 소외되었던 중증장애우를 우선 배려하고 있는 직업재활법이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참여와 평등을 통해 장애우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방향으로만 간다면 그 무엇도 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어떤 좋은 명분과 원칙이라도 장애우의 인간다운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장애우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장애우 몫이 있습니까? 고용촉진법을 개정한들 나아질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직업재활법 제정에 있어서 지나치게 명분과 원칙을 고집하고 있는 장애계 일부는 긴 안목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조치가 있고 미래에 필요한 조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시급한 현안은 먼저 해결하고 혹시 생겨날지 모르는 부작용은 미래에 가서 다시 다른 법과 제도로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칫 명분에 치우쳐서 계속 발목을 잡는다면 장애우 현실은 아무런 변화를 이룰 수 없고, 그 어떤 이념보다 중요한 장애우 삶은 끝내 어두운 그늘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입니다. 다가올 12월 정기국회가 폐회되는 순간 손에 무엇이 들려 있을지 침묵 속에서 지켜보고 있을 대다수 장애우들의 얼굴에 실망보다는 기대와 안도의 웃음꽃이 피어나길 고대합니다.
글/ 이태곤 기자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