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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 역사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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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는 본시 웅천이라 했고 백제 도읍이 옮겨진 후로 웅진이라 하였으니 곰과 인연이 깊다. 이제 겨울이 깊어가고 있는 금강가 곰나루 모래사장은 얼핏 얼어 마치 쿠션을 밟듯 푹신푹신했다. 다행인지 바람도 없고 햇살도 적절히 따스했다. 신정일 선생님의 자상한 설명은 우리를 백제의 전설로 그리고 동학의 시대로 안내했다.

곰나루는 고마나루, 구마나리, 고미나루라고도 불렸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사내가 연미산에 놀러갔다가 길을 잃고 배고파 바위굴 속에 쉬고 있던 중 한 처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런데 매일 굴을 나갔다가 음식을 가져오는 처녀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뒤를 쫓아가 보니 처녀가 곰으로 변하여 사슴을 잡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정체가 드러난 것을 알고 사내를 바위굴에 가두어 놓았고 사내는 암곰과 사는 동안 자식까지 둘을 낳았다.


어느 날 암곰이 바위로 굴을 막지 않고 나간 틈에 사내는 도망을 나와 금강을 헤엄쳐 건넜다. 뒤늦게 이를 알고 쫓아온 암곰은 멀리서 자식을 들어 보이며 돌아와 달라고 호소하였지만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더라. 암곰은 어린 자식들을 안고 금강에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니 그후부터 금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풍랑에 뒤집히는 일이 많아 나루 옆에 사당을 짓고 곰의 넋을 위로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1972년 돌로 새긴 곰상이 발견되었다. 공주박물관에서 실물을 보았는데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약간 위로 향하였는데 입은 다물고 양쪽 눈은 뜨고 있으며 양쪽 귀는 뒤에 붙어 있다. 앞다리를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린 채 앉아 있는데 발톱 등의 조각은 선명하지 않다. 오래된 탓인지 동물상임을 알겠으나 곰이라는 느낌은 쉽게 오지 않는다.

흔히들 부여를 흐르는 금강을 별칭으로 ‘백마강’이라 부르는데 그 유래를 안다면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소정방이 부소산성을 공격할 때 안개가 자욱해서 강을 건너기 어려웠음에 사람들이 백제의 의자왕은 낮에는 사람으로 밤에는 용으로 변해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삼아 용을 낚아 올리자 짙은 안개가 걷히고 백제를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소정방은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삼아 백마강이라 했으니 백마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는 아니되겠다.

곰나루 근처에 국립공주박물관이 있다. 만만치 않은 계단이 떡 버티고 서 있어 저곳을 어떻게 올라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건물 오른쪽의 언덕길로 올라갔다.

공주 국립박물관의 자랑이라면 1971년 농부가 밭을 갈다가 기적적으로 발견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대부분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은 내 기억속에는 가장 멋진 무덤으로 남아있다. 거의 유일하게 완벽하게 보존된 무덤이고 국내 유물 중에는 드물게도 벽돌로 쌓은 무덤.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다가 지석의 발견으로 무령왕릉의 것으로 알려지게 되어 백제사의 비밀이 그제서야 밝혀지게 되었다는 사실들이 매력을 끄는 무덤이다.

우금치(사적387호)는 익히 알려진 대로 동학 최대 격전지로서 1973년에야 비로소 위령탑을 건립하였다. “갑오농민혁명 기념비는 박정희가 세웠고, 황토현 기념비는 전두환이 세웠는데 광주항쟁 기념비는 누가 세울 것인가?"라고 개탄하며 신정일 선생님이 해주시는 동학얘기가 처연한 감정을 더욱 북돋았다.

공주를 함락시키기 위해 전봉준이 잡은 공격로는 다섯 곳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우금치였다. 전봉준은 1894년 11월 대군을 진격시켰다.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우금치가 바라보이는 산아래 있었다. 우금치 전투가 벌어지던 전날 밤, 농민군은 산 위에 올라 한꺼번에 횃불을 밝혔다. 날이 밝자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우금치를 지키고 있는 관군과 우금치 옆 뱁세울 앞산에 있는 일본군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관군과 일본군은 우금치 고개로 올라오는 농민군을 향해 뛰어난 화력의 신식무기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6, 7일간 4, 50회의 공방전이 전개되고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분투하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이들과의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들이 한가하게 넘어가는 높지도 않은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한 전봉준의 한을 뒤로 한 채 부여로 넘어갔다.
 

부여

 

부여라는 곳은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으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학창시절에 역사선생님이 고란사의 고란초 사이를 흘러내리는 약수맛이 기가 막히다고 하던 기억도 나고, 자신은 척추가 심하게 휘고 늘 물이 차 서른도 못 넘기고 죽을것이라고 늘 되뇌이던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던 고등학교 동창의 고향이 부여였다. 여기에 백제 유민의 한이 서린 곳이라는 사실들이 얽혀 부여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환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현재 부여국립박물관은 1993년 8월6일 신축 개관한 곳으로 건물이 대단히 현대적이고 장애우용 경사로도 잘 되어 있다. 마침 부여박물관 70년 기념전이 열려 화려했던 백제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유물은 백제금동향로였다. 1993년 능산리에서 발굴된 이 향로는 걸작 중의 걸작이란 사실을 들은 바 있었다. 언젠가 역사스페셜에서 이 금동향로가 소개된 바 있는데 우리 나라 고악기의 모습을 알 수있게 하는 유일한 유물이라 했다. 여기에 새겨진 5인의 악사가 다루고 있는 악기를 얼마전 실제로 제작, 재현해 연주하는 모습도 본 기억이 난다.

다음 행선지는 그 유명한 정림사지였다. 부여에 큰 기대를 갖고 오면 실망이요, 철저하게 이미지로 느껴야 한다는 신정일 선생님의 부여 8경의 설명에 우리 일행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으니 그 8경이란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에서 바라보는 아지랑이, 고란사에 울리는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그 마지막은 백제탑 즉,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서편하늘로 지는 저녁 노을이었다. 정림사지에 도착한 시간이 뉘엿뉘엿 해질녘 근처였으나 아쉽게도 저녁노을 질 시간은 아니었다.

이긴 자의 것은 모든 것이 남고 패자의 것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는 말처럼 백제탑 하나 달랑 남은 정림사지에 담을 둘러치고 입장료 800원을 받고 있음에 여러 사람이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역사 현장 보존에 제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 돈이 아깝지 않을테지만 역사 보존하나 변변히 하지 못하는 행정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국보 제 9호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목탑양식을 이어받고 있어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가는 시기에 나타난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 1층 탑신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후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기공문(紀功文)을 4면에 새겨 놓았는데, 당군이 660년 7월 18일에 사비성에 입성하여 그해 8월 15일 글을 지어 각자한 것으로 당군의 전승기록과 당에 끌려간 백제유민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어 패망 백제의 한을 더하고 있다. 탑 뒷편으로 무언가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강당지에서 발견되었던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보물 제 108호 정림사지 석불좌상이 놓여 있었다.

신동엽 시비를 찾아가는 대목에는 마침 저녁 해가 붉은 얼굴로 서녘하늘에 잔뜩 부풀려 있어 백제탑에 지는 노을의 모습을 실감케 했다.

신동엽은 1950년대 모더니즘에 훼손되지 않고 토착 정서에 역사의식을 담은 민족적인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는 점이 돋보였던 인상 깊은 시인이다. 특히 신동엽은 아무도 관심 없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금강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껍데기는 가라"에서는 통일에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타는 민족혼으로 삶을 불태우던 신동엽은 1969년 마흔이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간암으로 타계하고야 만다.

그의 시비는 작고 1주기를 맞아 유족과 친구들이 세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옆에 외람되게도 위압적인 반공순국 위령비가 세워져 있어 독재자의 교활한 의도를 느끼게 한다. 이 위령비는 자기가 앉을 자리를 잘못 앉은 비로서, 하루빨리 다른 곳에 옮겨 세워야 할 일이다. 시비에는 그의 가장 서정적인 시편인 「산의 언덕에」 두단이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신동엽의 생가는 들어가기가 불편해 마지막 행선지인 궁남지로 발길을 돌렸다.

답사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궁남지(사적 제 135호)였다. 서녘에 지는 해와 반대편의 그믐달은 백제의 성쇠와 백제인의 한을 자아내게 했다.
궁의 정남쪽에 있다해서 궁남지라 불리우는 이 연못은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왕궁의 남쪽에 만들었는데 백제시대 와편(瓦片)과 토기편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곳이 백제시대의 별궁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미 해는 떨어져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스산했지만 궁남지의 매력에 도취해 연못 가운데 포룡정을 향해 하염 없이 궁남지 근처 돌밭길을 거닐었다. 운치를 더하라고 만들어 놓은 돌밭길은 그러나 휠체어에는 쥐약이라 무척 애를 먹었다. 별스러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휠체어를 타는 이들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었으리라.

신정일 선생님의 구수한 입담으로 감동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가운데 추위도 잊고 마치 내가 백제 왕실의 한 사람이 되어 술잔을 띄우고 노니는 장면을 연상했다. 그것이 바로 백제의 매력이리라. 오는 봄에 진달래 화전에 국화주에 거나하게 취해도 보고 동남풍 부는 날 산에 올라 거풍(?) 한번 하자는 신정일 선생님의 약조를 기대한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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