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소리] 눈에 힘 좀 빼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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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동사무소에 들렀다가 우연하게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 나온 「장애우와 더불어 사는 사회 만들기」라는 아주 잘 만든 화보집이 눈에 띄었다. 과거 잘 하지도 못한 일을 아전인수격으로 생색내는 작태에 신물이 나 간행물 열람대는 쳐다보지도 않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이 화보집은 어떤 식으로든 장애우 중심으로 공공기관과 그 정책 실태를 살펴 장애우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장애우에 대한 올바른 용어사용에서부터 각종 편의시설 현황, 그리고 장애우의 사회적 연결망 등에 대해 여로 모로 신경을 썼다.
새 정부 들어 적어도 장애우에 대한 공공의식만큼은 상당히 높아졌다. 그것도 정부와 각종 지방자치단체의 주도로. 그러하니 보통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화보집의 면면을 자세히 뜯어보면 장애우 문제에 대한 공기관의 의지가 여전히 비장애우의 서슬푸른 눈길에 조직적으로 기죽는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공기관의 사회적 안목이 장애우 자신의 생활 속내까지 깊숙히 들어가지 못하는 측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홍보집은 장애우 편의시설을 부각시킬 때 주로 그 시설을 설치했느냐 여부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수사례로 서울대학교를 꼽으면서 이 학교가 “학칙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환경을 바꾸기 위하여" 기울인 여러 가지 노력을 집중적으로 홍보해 주고 있다. 당연히 칭찬 받을 일이지만 필자가 그 학교를 여러 번 출입하면서 겪은 경험은 그리 “장애우 친화적인"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은 서울대학교가 장애우 시설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치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관계요원들의 의식이 전혀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눈오는 날 중앙전산실 앞으로 갔더니 휠체어를 위한 입구 경사로는 그 앞 주차장에서 치운 눈더미를 쌓아놓아 막혀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이지만 계단 많기로 악명 높은 이 학교 중앙도서관의 대출대에 접근할 때 겪은 경험도 그리 장애우 친화적이지는 않다. 이 곳에 계단을 거치지 않고 접근하려면 차를 몰고 본부 곁을 지나 1동 앞을 거쳐 1층 현관으로 들어가 건물 안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4층까지 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문제는 본부까지 가는 통행로가 저녁 5시까지는 바리케이트로 막혀 그 옆의 경비실에서 열쇠를 열어주지 않으면 차량이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비 눈앞에서 아무리 장애우임을 보여주고 사정해도 오직 본부 관리과의 인증서가 있어야 통과시켜 주겠다는 고압적인 자세는 결코 수그러지지 않는다. “장애우 차를 운전하여 차량통과대를 지나갈 수 있도록" 개폐용 리모콘을 지급했다지만 도서관 접근에 결정적인 이 길목만은 자동통과대가 없이 장애우 친화적 의식은 전혀 교육받은 바 없는 경비들의 사나운 눈초리에 항상 전전긍긍해야 한다.
이 홍보집의 부록에 명시된 ‘장애우 편의시설 설치대상"도 가만히 훑어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공권력의 행사가 쉬운 업무시설에는 장애우 전용 주차공간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고, 실제로 많은 곳이 그렇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가 그런 공공시설에 접근해 보면 비장애우 차량이 이 공간을 선점하고 있어 다른 빈곳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면서 관리자에게 항의하면 퉁명하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뿐이다. 그리고 숙박시설 가운데서도 숙박비가 저렴한 여관이라든가 일상 주거지인 아파트나 연립주택 등의 공동주택에는 이런 의무가 적용되지 않아 장애우는 황송스럽게도 최고급 호텔만 이용해야 한다.
결국 장애우 편의시설은 장애우 친화적인 의식으로 훈련된 운영요원이 없으면 장애우에게 편리하기는커녕 장애우에게 미운 털 박아 넣은 칠성판이 될 판이다. 서울 시내 몇 안되는 지하철에 설치된 리프트야말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 한 번 이용하려고 했다가 혼이 난 장애우가 한두 명이 아닐 뿐더러 지난 여름에는 기어코 허술한 관리 때문에 추락사고라는 참변이 나고 말았다. 그럴 듯한 시설이 몸 성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부실 시공의 빌미가 아닐지, 아니면 시설관리를 핑계로 눈과 목에 힘주는 사람들의 어깨 힘만 북돋게 하는 것은 아닐지. 새 천년이라고 말들이 많고 이런 저런 준비도 많다는데 돈 들여 이것저것 마련할 것 있을까? 자기 낯바닥 위에 뻥 뚫린 곳에 박힌 그 두 눈에서 제발 힘 좀 빼고 삽시다, 그려.
홍윤기 동국대 교수, 함께걸음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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